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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99년 네이버/다음 검색포털 서비스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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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님, 야후는 ‘다음’이 물리치겠습니다.”
“지식까지 찾아주는 검색-네이버”

대한민국 검색 포털사이트 양대산맥인 네이버와 다음은 1990년대 후반 인터넷 저변 확대와 함께 일어난 닷컴 열풍에 힘입어 탄생했다. 지금은 두 사이트 모두 검색서비스를 제공하고 다양한 콘텐츠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합 포털 서비스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초기 서비스 기반과 지향점은 현재와 상당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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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다음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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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네이버 광고

다음, 한메일에서 포털사이트까지

시작은 다음이 먼저였다. 1995년 2월 탄생한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은 커뮤니티 서비스를 기반으로 성장했다. 첫 서비스는 인터넷과 예술의 융합을 꿈꾸며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교류하는 ‘버츄얼갤러리(Virtual Gallery)’였다. 그 밖에도 패션 전문 서비스 ‘패션넷’, 영화 정보 서비스 ‘싸이네마’ 등 콘텐츠 기반 온라인 서비스를 제공했다.

다음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계기는 1997년 5월 국내 최초의 무료 웹메일 서비스 ‘한메일넷’ 오픈이다. 미국의 ‘핫메일(Hotmail)’을 벤치마킹한 것인데, 당시 이재웅 대표는 무료 서비스와 연계한 온라인 광고로 수익을 얻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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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12월 한메일넷 초기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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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웅 전 다음커뮤니케이션 대표 (출처: 쏘카)

한메일넷은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마케팅 전략을 적극 사용했다. 한메일 초기화면에 태극 문양을 등장시켰고, 당시 인터넷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던 미국계 포털 야후(yahoo)를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도발적 광고를 내놓았다. 검색보다 메일이 인터넷의 기본 서비스이던 시절, 다음은 한메일을 통해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서비스 개시 1년 반만인 1998년 12월 회원 수 100만을 돌파했다. 당시 국내 인터넷 이용자를 400만 명으로 추산할 때 4명 중 1명이 한메일넷 계정을 가진 셈이었다.

1998년 12월 10일. 다음은 한메일넷 개편을 발표했다. 이메일은 물론 정보 검색부터 전자상거래, 통신, 채팅, 엔터테인먼트까지 포함하는 ‘원스톱 서비스’를 구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포털 진출 역시 온라인 광고시장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포털을 통해 온라인 콘텐츠를 유통하고 광고를 붙이면 사업성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다음은 당시 삼성SDS 사내벤처였던 네이버와 전략제휴를 맺어 한메일넷 홈페이지에 검색서비스를 시작하고, 데이콤인터파크와 제휴해 한메일넷쇼핑을 여는 등 사업을 확장했다. 또한 1999년 5월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다음카페’를 오픈해 일주일 만에 2,200개의 카페가 개설되는 돌풍을 일으킨다.

거칠 것 없는 상승세를 탔으나 다음은 내부적으로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회원 수 증가에 따른 서버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워 빚을 지며 서비스를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IMF 이후라 국내 경기도 크게 악화해 있었다. 그러던 중 1999년 6월, 독일에 기반을 둔 다국적 미디어회사 베르텔스만으로부터 500만 달러 투자 유치에 성공한다. 숨통이 트인 다음은 온라인 서비스에 승부수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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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7월 다음 초기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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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월 새로운 로고를 반영한 다음 초기화면

그해 7월, 다음은 브랜드명을 ‘한메일넷’에서 ‘다음’으로 바꾸고 사이트를 전면 개편했다. 본격적인 포털 서비스의 시작이었다. 이후 다음은 ‘인터넷이 마음의 벽을 허뭅니다’라는 광고 캠페인을 벌이며 카페 서비스를 주력으로 내세웠다. 마이칼럼, 미즈넷, 다음쇼핑 등 다양한 서비스도 새로이 제공했다. 같은 해 11월 다음은 포털 기업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됐다. 상장 이후 26 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으며 회원 수 500만 명을 돌파한다. 또한 다음은 2000년 1월 베르텔스만의 자회사 그루너운트야르와 한글 인식 검색엔진 ‘파이어볼’을 공동개발했다. 그동안 네이버의 검색엔진을 사용해왔으나 네이버가 포털 사이트를 지향하면서 경쟁자로 부각된 데 따른 변화였다.

이후 다음은 미국 잉크토미의 검색엔진을 도입하는 등 취약점으로 지적 받아온 검색서비스를 꾸준히 강화하며 검색 포털 서비스로서 경쟁력을 갖춰 나갔다. 2000년 하반기 흑자로 전환한 다음은 야후 코리아를 제치고 포털 사이트 시장점유율 1위 기업에 올랐다.

네이버, 사내벤처에서 포털 사이트까지

네이버의 시초는 1997년 2월 삼성SDS의 기술연구소에서 근무하던 이해진과 그의 동료들이 개발한 검색엔진 ‘웹글라이더’이다. 웹글라이더는 1997년 10월 삼성SDS가 만든 ‘사내벤처포트‘ 제도를 통해 사내벤처 1호 기업으로 공식 출범한다. 이후 웹글라이더는 이름을 네이버로 바꾸고 1997년 12월 네이버컴을 런칭한다. 삼성SDS의 자체 개발 검색엔진 ‘유니파인더’와 PC통신 나우누리의 인터넷 동호회에서 운영하던 국내 최초 디렉터리 서비스 ‘집(ZIP)’을 통합한 것이었다. 네이버컴은 자사의 검색엔진 기술을 판매해 타 웹사이트에 검색서비스 기능을 제공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검색 품질이 괜찮다는 평과 함께 잠재력을 보이며 1999년 6월 삼성SDS에서 분사해 독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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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네이버 초기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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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출처 : 네이버)

독립법인으로 새 출발한 네이버컴은 네이버 서비스를 런칭한다. 자체 개발한 검색엔진을 통한 빠르고 정확한 정보검색 서비스를 앞세웠다. 향후 종합 포털사이트로 발전하기 위해 어린이 전용 포털 ‘쥬니어네이버’ 서비스도 제공했다. 그러나 선발주자인 야후, 다음, 라이코스 등에 밀려 이용자 수 증가 속도가 더디었고 뚜렷한 수익모델도 부재했다. 당시는 포털의 핵심 수익모델인 검색 광고가 등장하기 전이었다. 네이버는 인지도를 올리고자 포털 사이트 TV 광고 경쟁에 합세했다. 마케팅 비용에 연간 50억 원을 쏟아 부었으나 효과는 크지 않았다.

네이버의 도약기는 2000년대에 찾아왔다. 2000년 7월 게임업체 ‘한게임’을 인수해 합병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2000년 2월 네이버 이해진 대표는 게임포털 한게임의 김범수 대표(현 카카오 의장)를 만나 합병 논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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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네이버 초기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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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4월 27일 이해진 네이버컴 창업자(왼쪽)와 김범수 한게임 창업자(오른쪽)가 두 회사 합병을 발표하는 모습. (출처 : 네이버)

네이버는 트래픽을 늘리면서 이용자들이 장시간 접속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서비스와 안정적인 수익구조가 필요했고, 한게임은 폭증하는 트래픽을 소화하기 위한 장비 증설과, 유료화 전환을 위한 새로운 사업모델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두 회사의 합병은 높은 시너지를 발휘한다.

자금난을 겪던 한게임은 네이버와 합병 이후 서버를 증설하고 네이버의 결제시스템을 기반으로 게임 부분 유료화 모델인 ‘한게임 프리미엄’을 오픈해 일주일 만에 매출 3억을 돌파한다. 한편, 네이버는 한게임을 통해 안정적 수입원을 얻어 검색엔진 고도화 작업과 서비스 개발에 주력할 수 있었다. 또한 한게임 사용자가 네이버로 유입되면서 이전에 비해 브랜드 인지도를 비약적으로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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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네이버 카페 광고

합병 이후 날개를 단 네이버는 새로운 서비스를 잇달아 오픈했다. 2000년 세계 최초로 통합검색 서비스를 내놓았고, 200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검색광고 모델을 선보였다. 2002년에는 ‘지식iN’, 2003년 ‘블로그’와 ‘네이버 카페’ 서비스를 연달아 성공시켰다. 특히 지식iN은 사용자가 직접 묻고 답하는 차별화된 서비스로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네이버는 검색, 메일, 커뮤니티 등 다양한 서비스와 콘텐츠를 제공하며 국내 최고 종합 포털사이트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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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네이버 메인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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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네이버 메인화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