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우리 기업이 경제사에 남긴 영광의 발자취와
역경을 딛고 성장한 스토리를 연대기별로 담았습니다.
특징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총회,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을 초대회장으로 추대(1961.8.16)
수출제일주의
산업화 초기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습니다. 우리 기업인들은 보세가공무역을 통한 경공업 공산품 수출, 지하자원 개발·생산 등 각종 수출진흥책을 정부에 건의했습니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시기 우리 기업들은 스웨터와 메리야스 등 의류, 합판, 가발, 신발 등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품을 세계로 수출했습니다. 이는 관련 공업인 화학섬유산업에 발전을 가져와 나일론, 폴리에스터, 아크릴 생산공장이 속속 들어섰습니다. 그 외에도 주석, 철광석 등 광물과 수산자원을 활발히 수출했습니다.
외자도입을 통한 공업화
월남 한일 국교 정상화와 월남 특수가 겹쳐지면서 우리나라 민간기업에 해외자본과 기술을 들여오는 외자도입이 줄을 이었습니다. 정부는 민간기업에 지불 보증을 해줌으로써 이를 적극 지원했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외자도입을 통해 공장을 짓고 사업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면서 일본으로부터 상업 차관이 줄을 이었습니다. 또한 다수의 재일 동포 기업가들이 6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 진출했습니다.
월남 특수 및 공기업 민영화
월남 파병이 확대되면서 베트남이 미국, 일본 다음 가는 수출 시장이 되었습니다. 우리 건설기업들은 베트남 운송하역 및 건설 시장에 진출해 월남 특수를 누렸습니다. 무역업체도 베트남에서 크게 활약했습니다. 또한 공기업의 민영화가 이루어지면서 1962~1969년 사이 대폭 신설된 공기업 중 7개가 민간기업에 매각되었습니다. 비료, 제철, 화학 등을 취급하는 공기업을 인수한 민간기업들은 이를 통해 사업 영역을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연도
- 1961.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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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경련) 창립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총회,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을 초대회장으로 추대(1961.8.16)
- 1962. 금성사(현 LG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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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기사회생

1959년 출시된 국내 최초 라디오 A-501 (출처: LG)
- 1964. 8.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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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차관 도입으로 한국비료 설립

1967년 4월. 한국비료공업 울산공장 준공식에서 식사를 하는 이병철 회장
(출처: 호암자전)
- 1964. 서울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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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발 수출 본격화

1960년대 구로공단 가발공장 모습 (출처: 산업통상자원부)
- 1964. 천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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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세 가공 및 합판 수출로 수출 기업 1위 달성

1964.12.5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수출의날 기념식
(출처: 국가기록원)
- 1965. 선경산업(현 SK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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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섬 산업 진출

1966년 선경화섬 수원공장 (출처: SK케미칼)
- 1966. 3. 한진상사(현 한진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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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수송계약 통해 도약

1968년 월남 퀴논항을 시찰하는 한진상사 조중훈 회장 (출처: 한진그룹)
- 1966. 11.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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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나이론(현 효성그룹) 설립

1966년 11월 동양나이론(현 효성그룹) 동양 최대 화학섬유공장
울산에 준공 (출처: 효성)
- 1967. 3. 롯데제과 (현 롯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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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제과 설립

1965년 김포공항에 입국하는 신격호 (맨 오른쪽)
(출처: 롯데)
- 1968. 4. 포항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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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항종합제철 창립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현판식(왼쪽 박태준 사장)
(출처: 포스코)
- 1968. 11. 대우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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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의 날’에 대통령상 수상

1968년 부산 대우실업 공장에서 김우중 사장(맨 왼쪽)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 1969. 1. 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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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전자공업 설립으로 전자산업 진출

1970년에 완공된 삼성전자 수원공장 (출처: 삼성50년사)
- 1969. 3. 한진상사(현 한진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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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자였던 국영기업 대한항공공사 인수

1969년 3월 김포국제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출처: 대한항공)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총회,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을 초대회장으로 추대(1961.8.16)
1961. 8. 16. 한국경제인협회 창립(현. 전국경제인연합회)
1961년 1월 10일 국내 기업가 68명이 모여 일본 경제단체 게이단렌을 모델로 하여 ‘한국경제협의회’를 만들었다. 얼마 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기업가 대표들을 부정축재 및 탈세혐의로 체포 수감한다.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은 박정희 부의장과의 독대를 통해 "부정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들에게 별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인들이 사업을 일으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7월 13일 대표 기업가 13명이 석방되었고 이들은 이틀 후인 7월 15일 ‘경제재건촉진회’를 만들어 기간산업을 육성하기로 한다. 며칠 후 8월 16일 임시총회를 열고 기존의 ‘한국경제협의회’를 ‘한국경제인협회’로 개명하고,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해 활동하기로 한다. 1968년 회원수가 160명까지 늘어나 종합경제단체로 성장하자 오늘날 ‘전국경제인연합회’로 다시 한번 이름을 바꾼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경제개발 과정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1961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관련한 기간산업 민간계획 시안을 제시했고, 그해 11월에는 미국과 유럽에 차관 유치를 위한 민간 투자 교섭단을 처음 파견하여 1960~70년대로 이어지는 외자 도입 실현에 초석이 됐다. 1962년 1월에는 울산 공단 건설을 정부에 건의했고, 창원과 구로공단 건설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에도 1972년 정부에 사채동결 건의, 1977년 오늘날 의료보험제도의 모태가 된 기업의료보험제도 도입, 88서울올림픽 유치활동, 2008년 한미 비자면제 협정 성사에 일조하였으며, 세계 각국 경제계와 교류를 통해 민간외교를 수행하는 등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공헌해왔다.

1959년 11월 출시된 국내 최초 라디오 A-501 (출처: LG)
1962. 금성사(현 LG그룹)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기사회생
금성사는 1959년 국내 최초 라디오 A-501과 1960년 국내 트랜지스터라디오 제1호 TP-601을 출시하며 한국 전자산업의 태동을 알렸다. 금성사는 라디오를 시작으로 선풍기, 냉장고 등 국산 1호 제품을 연이어 내놓으며 전자산업의 기반을 닦았다. 1961년에는 자동 전화기를 생산하는 등 생산 능력 확충과 제품 다변화에 주력했다. 그러나 초창기 라디오 판매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 당시 소비자들은 일본과 미국산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1962년 정부의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으로 금성사는 기사회생의 전기를 맞았다. 정부 시책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라디오가 활용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금성사 라디오 생산량은 늘어남과 동시에 국내시장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960년까지 수 만대에 불과하던 라디오 판매 대수가 1962년에는 134만대로 급증했으며 그해 한국 최초로 미국과 홍콩에 수출까지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금성사는 1962년 말 사원 수 1,000여 명에 달하는 큰 회사로 성장했다.

1967년 4월. 한국비료공업 울산공장 준공식에서 식사를 하는 이병철 회장 (출처: 호암자전)
1964. 8. 삼성 일본 차관 도입으로 한국비료공업 설립
1960년대 우리나라는 전 국민의 60%가 농사를 짓는 농업 국가였다. 그러나 농사에 필요한 비료공장이 없어 비료를 전량 수입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에 삼성물산 창업주 이병철은 35만톤 규모의 최신식 비료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고 유럽으로 날아가 독일의 철강회사 크루프, 이탈리아의 비료회사 몬테카티니와 차관 도입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4.19 혁명에 이어 5.16 군사혁명까지 일어나면서 비료공장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자 정부는 식량 자급화를 위해 이병철에게 비료공장 건설을 요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1964년 8월 20일 삼성은 미쓰이물산과 4,190만 달러 차관 계약을 성사시켰다. 여기에 200만 달러가 추가되어 총 4,390만 달러의 차관을 도입했다. 우리나라 기업이 정부의 보증 없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민간 차관 계약이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민간 기업들 간의 차관 도입 경쟁에 불이 붙었다. 1964년 8월 27일, 삼성은 한국비료공업을 설립하고 울산공단 내에 35만평의 부지를 사들였다. 1965년 12월 정지공사를 시작하여 1967년 4월 20일, 마침내 세계 최대규모의 비료공장이 건설됐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로 물꼬가 터진 차관 도입은 1960년대 기업 성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정부는 민간 기업의 차관에 대해 지불 보증을 서며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분별한 차관 도입으로 1967년 말부터 상환 부담이 가중되면서 상당수가 부실기업으로 전락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구로공단 가발공장 모습 (출처: 산업통상자원부)
1964. 서울통상 가발 수출 본격화
가발제조는 우리나라 여성의 섬세한 손재주와 풍부한 노동력,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원료라는 면에서 1960년대의 우리나라에 딱 맞는 업종이었다.
서울통상㈜ 창업주 최준규는 가발 수출의 가능성을 보고 업계에 뛰어들었다. 마침 미국이 중국산 원모로 만든 홍콩·일본산 가발에 대해 일시 수입금지 조치를 취했다. 베트남전을 벌이던 와중 북베트남을 지원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서울통상은 1964년 국내 최초로 가발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한국산 가발은 미국 시장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서울통상은 1969년 구로공단 제2단지에 입주했다. 1천여 명 여공을 거느린 대규모 가발공장을 보유하며 제2단지 총 수출액의 34%인 439만 달러의 실적을 올렸다.

1964.12.5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1회 수출의날 기념식 (출처: 국가기록원)
1964. 천우사, 보세 가공 및 합판 수출로 수출 기업 1위 달성
천우사(天友社) 설립자 전택보는 자원도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수출을 늘리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중간제품을 수입해 가공 수출하는 보세 가공 무역이 최선이라고 주장했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택보의 조언에 따라 보세 가공 무역을 국가 시책으로 결정했다.
천우사는 간단한 의류 봉제품부터 가공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어 합판을 만드는 대성목재를 인수했다. 1960년 3월 천우사가 합판 수출을 개시한 이래 1961~63년까지 합판은 단일품목으로 가장 많은 수출을 기록했다. 천우사는 1964년 수출기업(민간부문) 1위를 달성하여 대통령 표창과 산업훈장을 받았다.
한국의 공산품 수출이 급증한 것은 당시 세계경제 흐름과 관련돼 있다. 제2차대전 직후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세계경제는 고도성장을 거듭했다. 이에 따라 선진국에서는 소득과 임금이 크게 상승하며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자연스럽게 의류, 완구, 가발, 신발 등 단순 가공 경공업은 노임이 싼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갔다. 개발도상국은 경공업을 유치해 공산품 수출 기회를 잡았다. 당시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섬유, 가발 등의 경공업 기업과 현장 근로자의 노력으로 오늘날의 국가발전과 경제적 풍요의 토대를 닦아냈다.

1966년 선경화섬 수원공장 (출처: SK케미칼)
1965. 선경산업(현 SK그룹) 화섬산업 진출
경공업품 수출 확대는 관련 공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 등 화학섬유산업이 그 대표다. 선경산업은 1965년 화섬산업에 진출했다. 일본 데이진(帝人)과 합작해 폴리에스터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데이진이 거절함에 따라 대신 아세테이트원사를 제조하기로 했다.
아세테이트원사 제조업은 국제적으로 사양산업화 되면서 국내기업들이 진출을 꺼리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아세테이트에 대한 수요가 많아 선경이 진출하면 독점화를 통해 사업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일본데이진과 합작투자로 건설한 일산 아세테이트 원사 공장 운영을 위해 1966년 6월 선경화섬을, 1969년 7월에는 건설 중인 폴리에스터 공장을 모체로 선경합섬을 설립했다. 폴리에스테르 원사 일일 생산량 7톤으로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선경은 일본 이토추(伊藤忠) 상사로부터 550만달러의 차관을 확보하고 1968년 3월에 아세테이트원사 공장을, 6월에 폴리에스터 공장을 각각 착공했다. 당시 정부는 폴리에스터 원사를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폴리에스터 공장 건설 자금을 지원했다.

1968년 월남 퀴논항을 시찰하는 한진상사 조중훈 회장 (출처: 한진그룹)
1966. 3. 한진상사(현 한진그룹) 베트남 수송계약 통해 도약
한진은 주한미군의 수송용역을 전담하며 쌓은 신용을 바탕으로 1966년 3월 월남 주둔 미군사령부와 군수물자 하역 및 수송 계약을 체결했다. 국내 기업 사상 최초의 국외 수송이었다. 첫 해 계약금은 790만 달러로 당시 국내 업체가 베트남에서 따낸 최고액이었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간 베트남 군수 물자 수송을 통해 한진은 총 1억5000만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화 총액이 5,000만 달러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이를 통해 한진은 중견기업에서 대기업으로 도약했으며 대진해운(한진해운 전신) 등 수송 관련 자회사를 잇따라 설립하면서 종합물류기업으로 발전했다.

1965년 김포공항에 입국하는 신격호 (맨 오른쪽) (출처: 롯데)
1967. 3. 롯데제과주식회사 설립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막대한 일본 자본이 한국으로 진출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한국, 일본, 미국, 세 나라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물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 자본을 국내에 끌어들이고자 했다. 롯데, 판본(방림), 코오롱 등 재일 교포 기업가가 세운 기업들이 이때 한국으로 역진출했다.
롯데는 일본강점기인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대표 식품기업으로 자리매김 시킨 교포 실업가 신격호가 세운 회사였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한국에 진출한 신격호는 1967년 3월 24일 한국에 롯데제과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기능직 350명, 일반 사원 150명으로 총 500여 명의 중기업 규모로 출발해 제1공장에서는 껌을, 제2공장에서는 빵과 비스킷, 캐러멜 등 과자류를 생산하였다.
당시 국내 제과업계는 해태제과와 동양제과가 시장을 양분하며 경쟁하고 있었으나, 후발주자인 롯데는 막강한 자본과 품질 좋은 제품, 선진화된 판매 기법 등으로 단숨에 업계 정상에 올랐다.

1968년 부산 대우실업 공장에서 김우중 사장(맨 왼쪽)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1968. 11. 대우실업 ‘수출의 날’에 대통령상 수상
대우실업은 설립 첫해인 1967년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서 셔츠, 슬립 및 팬티, 파자마 등 내의류 원단으로 사용되는 나일론 트리코트지와 폴리에스테르 트리코트지 58만 달러를 수출했다. 당시 비교적 큰 수출업체들의 연간 수출액이 100만 달러 내외였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과였다.
대우실업은 수출 금융을 이용해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스웨터, 완구, 가발, 자전거 등으로 수출 상품을 다변화하며 해외 시장을 개척했다. 인도네시아에 트리코트지를 직수출하여 1968년에는 수출액만 292만 달러를 달성하였다. 그해 말 대우실업은 ‘수출의 날’에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1969년에는 미국 바이어를 확보하면서 세계 최대의 섬유 시장인 미국에 진출한다.

1970년에 완공된 삼성전자 수원공장 (출처: 삼성50년사)
1969. 1. 삼성물산 삼성전자공업 설립으로 전자산업 진출
금성사 등 민간업체 주도로 전자제품의 국산화가 시작되자 정부도 적극적으로 전자산업 육성에 나섰다. 정부는 흐름에 맞춰 전자공업진흥법(1969.1) 등 전자산업 육성계획을 쏟아냈다.
당시 전자산업은 외국산 부품으로 조립해 생산 판매하는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의 저렴하면서도 양질의 노동력에 반한 미국과 일본의 전자업체들이 부품 생산을 위해 단독투자나 합작투자 형태로 대거 진출해 왔다. 국내기업도 전자산업에 속속 진출하였다.
삼성이 사업타당성 검토 끝에 전자산업 진출을 선언하자 기존 전자업체들이 반발했다. 국내 최대 기업집단이던 삼성이 전자산업에 뛰어드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가 전자산업을 국가적 사업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TV와 진공관 등 생산품 전량을 수출하는 조건으로 이를 수락하고 전자산업 전반의 개방을 지시했다. 마침내 삼성물산은 1969년 1월 13일 삼성전자공업을 설립하면서 전자산업에 진출한다.

1969년 3월 김포국제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출처: 대한항공)
1969. 3. 한진상사(현 한진그룹) 적자였던 국영기업 대한항공공사 인수
1969년 3월 1일, 한진상사는 도산 위기에 있었던 국영기업 대한항공공사(KAL)를 인수했다. 당시 대한항공공사는 만성적인 적자 상태에 있었다. 정부는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 회장을 대한항공공사 사업자로 지목했다. 1961년 한국항공을 설립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중훈은 정부의 인수 요청을 세 차례 고사했다. 그러나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에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겠냐.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둘째 치고,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 순방 한번 해보는 게 소원”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간곡한 권유에 결국 인수를 결심한다. 임원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조 회장은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감당해야 할 시대적 소명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한진이 대한한공공사를 인수하면서 대한항공공사는 설립 7년 만에 민영화되었다.
공기업 민영화는 당시 정부 산하 공기업민영회추진위원회에 의해 계획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 공기업은 정부 정책을 달성하는 주요 수단이었으며 새로운 전략산업을 육성하는 인큐베이터였다. 민간자본 축적 수준과 민간기업의 역량이 높아지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운수와 항공 분야의 공기업 민영화가 추진되었다.

1968년 4월 1일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 현판식(왼쪽 박태준 사장) (출처: 포스코)
1968. 4. 포항종합제철 창립
해방 이후 정부는 제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제철 공장 건설 추진을 시도했다. 그러나 기술과 자금 부족으로 좌절되는 과정이 되풀이 됐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당시 정부는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종합제철소 건설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1967년 3월 종합제철소 건설 자금 확보를 위해 미국 코퍼스 사를 중심으로 5개국 8개사가 참여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발족됐다. 1968년 4월 1일에는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설립되고 대한중석 사장이던 박태준이 대표로 선임됐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KISA의 건설안을 검토한 당시 세계은행(IBRD)이 종합제철 사업에 대해 부정적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차관 도입은 난관에 봉착하고 KISA와 지리한 협상이 이어졌다. 결국 1969년 9월, KISA와의 기본협정이 자동해지되면서 KISA를 통한 제철소 건설 계획이 백지로 돌아간다.
정부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대일 청구권 자금 전용 방안을 일본 정부에 타진했다. 일본이 난색을 표하자 박태준 사장이 실무 교섭단을 구성하여 일본 철강업계 설득에 나섰다. 그 결과 이른바 일본 그룹(JG)의 협조 각서를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1969년 10월 말 한국에 파견된 세계은행(IBRD) 조사단이 일본에 긍정적 보고서를 전달함으로써 1969년 12월 3일, 마침내 포항종합제철소 건설 자금 조달을 위한 한일간 기본 조약이 체결되었다. 62년부터 추진해 오던 종합제철 사업이 실행에 들어가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1966년 11월 동양나이론(현 효성그룹) 동양 최대 화학섬유공장
울산에 준공 (출처: 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