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ENU

이원만 (코오롱)

대한민국 경제를 성장·발전시켜온
한국 대표 기업인의 삶과 경영철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물

이원만

1904년 9월 7일 ~ 1994년 2월 14일
이원만

코오롱그룹의 창업주로 우리나라에 나일론을 최초로 들여와 '현대판 문익점'이라 불리며 국민의류 생활에 번혁을 일으키고 섬유강국의 신화를 써 내려 간 주역입니다. 정부에 수출입국, 공업단지 조성을 건의하고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오늘날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조성을 이끈 '수출한국의 선구자'입니다.

생애

1904 ~1944

  • 1904.9
    • 경북 영일군 출생
  • 1922
    • 경북 영일군 산림기수보
  • 1935.5
    • 아사히공예주식회사(오사카) 설립
  • 1937.3
    • 아사히피복주식회사(오사카) 설립

1945 ~1954

  • 1945
    • 경북기업주식회사(대구) 설립
  • 1949
    • 재일 한인 경제동우회 창립, 부회장 취임
  • 1951
    • 삼경물산(일본) 설립
  • 1954
    • 개명상사 설립

1955 ~1964

  • 1957.4
    • 한국나이롱주식회사 설립
  • 1958
    • 재일 한국인 경제인연합회 회장 취임
  • 1960.7
    • 5대 국회의원 당선(참의원, 경북, 민주당)
  • 1963
    • 한국수출산업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
  • 1963.8
    • 한국나이롱 원사공장 준공
  • 1963.11
    • 제6대 국회의원 당선

1965 ~1994

  • 1967
    • 대통령 유공표창 수상
  • 1967.4
    • 구로 한국수출산업공단 준공 (창립위원장: 이원만)
  • 1967.6
    • 제7대 국회의원 당선
  • 1968
    • 삼경개발 설립
  • 1971.3
    • 한국폴리에스텔 구미공장 준공
  • 1972
    • 한국나이롱, 한국폴리에스텔 명예회장 취임
  • 1974
    • 삼경국제관광 설립
  • 1975
    • 삼경건설 대표이사 취임
  • 1976
    • 코오롱그룹 회장 취임
  • 1977
    •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취임
  • 1977.10
    • 은탑 산업훈장 수훈
  • 1981.10
    • 오운문화재단 설립
  • 1994.2
    • 별세
  • 1994.2
    • 금탑산업훈장 추서

주요사건과 업적

  • 회사 이름을 새겨 넣은 모자

    경북 영일군의 산림을 관리하는 산림기수보로 평범한 직장생활을 이어온 청년 이원만은 새로운 세상에서 포부를 펼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1933년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신문 배급소의 배달원 일을 시작한 그는 조선인을 향한 일본인의 차별과 무시 속에서 기필코 기술을 배워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정하고 끈기 하나로 알루미늄 공장에 일자리를 얻는다. 이원만은 공장 작업자들의 머리와 눈을 보호하기 위한 모자가 필요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모자에 공장의 이름이나 광고문구를 인쇄하여 홍보할 아이디어를 더하여, 자신만의 사업을 개척하기로 결심한다. 1935년 5월 오사카에서 이원만은 일본땅을 밟은 지 2년 만에 광고용 모자를 생산하는 아사히공예주식회사의 문을 열었다. 시제품을 생산하여 직접 영업에 뛰어든 그의 노력은 하루 4만개의 광고모자를 만들고 직원 수 1,000명이 넘는 기업으로의 성장을 일궈낸다.

  • 재일한인들을 보듬으며
    고국을 그리다

    이원만은 재일동포에게 불리한 법과 관행을 보이는 일본에 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으로 일본에 사는 한국 사업가들을 위한 단체를 조직한다. 1949년 ‘재일 한인 경제동우회’를 만들어 부회장에 취힘한 그는 재일 경제인들의 뿌리는 결국 고국임을 강조하며 끈끈한 결속을 이끌어냈다. 이원만은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고통받는 조국을 위해 알루미늄 식기와 의류를 구호품으로 보냈다. 재일동포 신용조합을 만들어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등 조국과 재일 사업가들을 위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 1953년 국내최초 나일론 상륙

    한국전쟁 후 나라를 재건하고 복구하고자 이원만이 주목한 것은 ‘나일론’이었다. 거미줄보다 가늘고, 강철보다 강하며, 명주보다 고운 값싸고 질긴 나일론이야말로 국민들의 의생활에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 생각하고, 1953년 조국으로 돌아와 개명상사를 설립하고 나일론을 수입 판매 하였다. 이원만은 당시 부녀자들이 매일 같이 겪는 빨래의 고통과, 의복과 양말 뒤꿈치를 바늘로 꿰매는 고역의 생애를 질기고 튼튼한 나일론을 통해 해방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는 ‘현대판 문익점’이라는 별명을 얻게 하였다.

  • 메이드인코리아 나일론 생산

    이원만은 나일론 원사를 가공해 부드럽게한 ‘스트레치 나일론사’ 수입으로 외화유출이 심하다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직접 만들어 보기로 결심한다. 1957년 4월 ‘한국나이롱주식회사(코오롱의 전신)’를 설립하여 대구 신천동 일대에 공장을 지은 이원만은 몇 번의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긴 투지의 결과로 1959년 1월 스트레치 나일론사를 생산하는데 성공하여 1963년 4월에는 국내 최초로 스트레치 나일론을 수출한다. 더 나아가 이원만은 일본 도레이 사로부터 나일론 제조기술을 이전 받아 1963년 8월 서울 구로공단에 나일론 원사공장을 준공하고 1964년 1월 ‘나일론6’ 원사를 생산해 상품명을 ‘코오롱(KOLON)’으로 짓는다. 코오롱이 대한민국의 합성섬유 시대를 연 것이다.

  • 성공한 사업가이자 정치인

    이원만은 성공한 사업가에 만족하지 않고 정치에 참여해 국가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1960년 참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경상북도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된 이원만은 제6,7대 국회의원을 잇따라 역임하며 경제 관련 분과위원회에서 사업가로서의 경험과 역량을 십분 발휘하였다. 10여년간 의정생활 동안 차관을 통한 국가 산업발전을 주장하고, 적극적인 수입정책을 세우자는 의견을 제시했으며, 나무 대신 프로판가스를 연료로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하여 ‘프로판가스’라는 별명도 얻어가며 적극적인 민생구제의 정치생활을 이어나갔다.

  • 구로공단, 구미공단 조성을 주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하에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한국경제인협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와의 긴밀한 회의를 통해 나라의 부강을 위한 방안들을 고민했다. 1962년 한국경제인협회 이사로 경제간담회에 참석한 이원만 회장은 박정희 의장에게 공업을 통한 경제발전이 필요함을 강하게 주장했다. 강한 인상을 남긴 이원만은 다시 박정희 의장의 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공업단지 조성을 건의한다. 그 결과로 이원만은 1963년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구로공단과 구미공단 조성을 주도했다. 두 공단은 섬유류, 가발, 플라스틱, 전자제품 등 제조업 중심의 수출 길을 열어 국가경제의 고도성장을 견인하여, 이원만은 ‘수출한국의 선구자’로 불리며 1968년 대통령상, 1977년 은탑산업훈장, 1994년 영면한 뒤에도 금탑산업훈장을 수여 받는다.

  • 나일론에 이은 폴리에스텔 생산

    이원만은 나일론과 양대산맥을 이루는 합성섬유 ‘폴리에스텔’ 생산에도 관심을 가진다. 폴리에스테르는 나일론에 비해 신축성은 떨어지지만 내구성이 좋아 겉옷이나 침구류, 커튼 등에 많이 사용되는 섬유이다. 풍부한 용수와 노동력, 편리한 교통 등 좋은 조건을 가진 구미를 생산기지로 선택한 이원만은 1971년 3월 ‘한국폴리에스텔’ 구미공장을 준공한다. 이를 시작으로 구미는 제일모직, 제일합섬, 동국방직, 한국도시바, 금성사, 대우전자, 삼성전자 등으로 꾸려진 거대한 공단으로 성장했고 수출 대한민국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 칸맞춤을 위한 빈 li
  • 칸맞춤을 위한 빈 li

경영철학

이원만

제대로 된 기업가라면 ‘상지상(上之上)’의 사업을 해야할 것

“기업가가 이윤을 올리고 그것이 국가의 이익이 되면 상지상의 사업인 것이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나일론 사업과 폴리에스테르 사업이 상지상의 사업이라고 자부한다”

이원만은 평소 사업을 다음의 네 가지로 구분했다. 나라도 잘되고 자기도 잘되는 ‘상지상’, 나라는 잘되는데 자기는 이익이 없는 ‘상지하’, 나라를 망치고 자기만 잘되는 ‘하지상’, 나라도 망치고 자기도 망하는 ‘하지하’. 그는 나일론으로 생산한 합리적인 가격의 질긴 의복으로 국민생활 수준을 향상시켰고 나일론 수출로 국가 경제부흥에 이바지 한, 진정한 ‘상지상’의 가치를 이뤄낸 불굴의 기업가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