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ENU

1. 1959년 한화 다이너마이트 국산화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한국경제의 결정적 순간 등
기업활동과 관련된 컨텐츠들을 실었습니다.

“아직 깃발이 내려오지 않았나?”

1957년 5월 29일. 한화 인천화약공장 초화공실을 둘러싼 토제 위에 붉은색 대형 깃발이 펄럭였다. 다이너마이트의 핵심 원료인 니트로글리세린 합성 작업이 진행 중임을 나타내는 깃발이었다. 예상 작업시간은 50분. 그러나 1시간이 지나도록 깃발이 내려가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초화공실 내에는 세 명의 기술자 외에 누구의 접근도 허용되지 않았다. 니트로글리세린은 작은 열에도 쉽게 폭발하는 성질이 있어 제조과정에서 폭발사고가 빈번했다. 세계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노벨도 니트로글리세린 폭발로 동생을 잃은 바 있었다.

사건사진

▲ 1955년 한국화약주식회사 인천공장 기념사진 (출처 : 한화)

찰나의 실수가 대형참사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 독실한 성공회교회 신자였던 김종희 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한 기도 뿐이었다. 직원들 몇은 폭발사고가 일어날까 두려워 귀를 막고 몸을 떨었다.

2시간이 지나도 깃발이 내려오지 않자 기다리다 못한 신현기 제조과장이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그가 정신없이 달려 토제 안으로 들어선 순간, 기술자들이 초화공실 문을 열고 나왔다.

“성공했습니다” 무사히 끝났다는 안도감에 네 사람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화약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자체 기술력으로 니트로글리세린 제조에 성공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다이너마이트 김이 화약 국산화를 결심한 이유

한화그룹의 모태인 한국화약의 전신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일본인들이 세운 ‘조선화약공판’이다. 당시 조선화약공판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화약류 판매를 전담하던 곳이었다. 현암 김종희는 1942년 일반 사원으로 화약공판에 입사해 광복 후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화약 산업의 중요성을 깨닫고 ‘해방된 조국의 화약계를 지키는 등대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미군정, 6.25 전쟁 중에도 화약 사업을 이어나가 ‘다이너마이트 김’이란 별명을 얻었다.

사건사진

▲ 현암 김종희 회장 (출처 : 한화)

1952년 휴전 이후 현암은 조선화약공판 매각 입찰에 나서 운영권을 얻는다. 그해 10월 9일 ‘한국화약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55년에는 조선유지주식회사의 인천화약공장을 인수했다. 인천공장은 남한에 유일하게 남은 화약 제조공장이었으나 전쟁 중 폭격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상태였다. 현암은 공장 복구에 힘쓰는 한편, 화약 자체 생산 연구에 돌입했다.

현암이 화약 국산화를 결심한 것은 화약이 조국의 미래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산업용 화약은 광공업이나 도로, 부두, 철도를 놓는 등 토목공사에 쓰여 나라의 기간산업을 다지는 데 필수적이었다. 또한 기술 국산화에 성공한다면 화약 수입에 지출하는 외화를 아낄 수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루속히 화약 만드는 방법을 강구해 보라’며 뜻을 전달해온 것도 결정적 계기가 됐다.

사건사진

▲ 한국화약 초기 초화공실 (출처 : 한화)

사건사진

▲ 한국화약에서 생산한 젤라틴 다이너마이트 (출처 : 한화)

국가 재건의 초석을 다진 다이너마이트

사건사진

▲ 1959년 인천공장을 방문한 이승만(가운데) 대통령에게 공장현황을 설명하는 김종희(왼쪽에서 세번째) 회장(출처:한화)

다이너마이트 생산의 기초단계인 니트로글리세린 합성에 성공한 후 다음 단계 작업들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1958년 6월. 한국화약은 마침내 국내 최초로 젤라틴 다이너마이트 시제품 생산에 성공한다. 7월에는 국방부 과학연구소 주관 하에 시험 발파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1959년 1월부터는 상업 생산에 돌입했다. 이로써 한국은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는 국가가 됐다. 1959년 6월, 정부는 일반산업용 화약 수입을 모두 중단하고 일본산 화약을 한국화약의 국내산 화약으로 완전히 대체했다.

이후 한화는 1960년대 들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다이너마이트를 공급해 국산 화약의 저력을 증명해 보였으며, 국가 재건과 산업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또한 이때 벌어들인 돈을 발판으로 1960~70년대 사업 다각화에 나서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사건사진

▲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출처:한화)

사건사진

▲ 박정희 대통령에게 석유화학단지를 소개하는 김종희 회장(출처: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