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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74년 현대중공업 1호선 진수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한국경제의 결정적 순간 등
기업활동과 관련된 컨텐츠들을 실었습니다.

“저 거대한 무쇠덩이가 과연 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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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틀랜틱 배런호 명명식 및 진수식(1974. 6. 28) 출처 : 현대중공업

1974년 2월 15일 새벽 1시경, 세차게 불던 바람이 그쳤다. 현대그룹 창업주 아산 정주영과 500여 명의 사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현대중공업 제1호선의 진수가 시작됐다. 길이 344.42m에 폭 51.82m, 높이 26.52m. 우리나라 최초의 초대형 유조선(VLCC)을 바닷길로 내보내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조타석에는 배를 움직일 독 마스터(Dock Master)가 없었다. 이 한번의 진수 작업을 위해 외국에서 어렵게 독 마스터를 초빙해왔건만 작업을 거부했다. 드라이 독과 방파제 입구가 좁아 26만 톤급 배가 빠져나가기 무리라는 것이었다. 아산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며 26만 톤급 대형선박을 몰아본 적 없는 선장과 항해사 등을 이끌고 조타실로 향했다. 갑문이 열리자 바닷물이 독 안으로 밀려 들었다. 꿈쩍도 않는 배를 보며 아산은 생각했다. “저 거대한 무쇠덩이가 과연 뜰 것인가.” 바닷물이 독을 가득 채워갈 즈음,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떴다! 배가 떴다!”

이제 선박을 독에서 끌어내어 안벽에 정박시켜야 했다. 어렵게 구해온 예인선이 힘을 쓰지 못 해 도크 양쪽에 네 대의 불도저가 붙어 배를 끌기 시작했다. 불도저 간에 호흡이 맞지 않아 배가 휘청이며 좌우 안벽에 부딪혔다. 지켜보던 모두가 달라붙어 로프를 걸고 힘껏 잡아당겼다. 비로소 배의 평형이 맞춰졌다. 마침내 1호선이 파도를 가르며 울산 미포항 앞바다로 나아갔다. 진수에 성공한 것이다. 현장에 있던 이들은 서로를 얼싸안았다. 새벽 5시. 진수를 시작한 지 4시간 만이었다.

조선산업, 중화학공업 시대를 열다

4개월 후인 1974년 6월 28일. 1, 2호선의 명명식과 진수식, 울산조선소의 준공식이 함께 치러졌다.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가 동시에 이뤄진 것은 세계 조선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식장에는 그리스의 선주 리바노스, 박정희 대통령 내외, 국내외 유력인사, 현대중공업 임직원과 울산시민 등 5만여 명이 참석했다. 그들 앞에는 갑판 넓이가 상암경기장의 두 배가 넘고 화물적재 중량만 26만톤(DWT)에 달하는 거대한 유조선 두 척이 우뚝 서 있었다. TV를 통해 행사가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아산이 개식을 선언했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내외분과 선주이신 리바노스 사장님, 그리고 국내외 귀빈 여러분을 모시고 새로운 조선산업의 역동을 알리는 진수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수문을 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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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울산조선소 시업식에서 연설하는 정주영 회장 (1973. 3. 20) 출처 : 현대중공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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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에서 정주영 회장과 아내 변중석 여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애틀랜틱 배런’을 명명하는 육영수 여사(1974. 6. 28) 출처 : 현대중공업

박 대통령은 “오늘 명명식은 중화학공업의 발전을 기약하는 선언이자 도약하는 국력의 상징”이라고 치사했다. 1호선은 ‘애틀랜틱 배런(대서양의 남작)호’, 2호선은 ‘애틀랜틱 배러니스(대서양의 남작 부인)’로 명명됐다. 육영수 여사가 금도끼로 진수식 테이프를 끊자 뱃고동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수천 개의 풍선과 함께 비둘기가 날아올랐다.

세계 해운업계의 거물이자 까다롭기로 소문난 선주 리바노스는 “지금까지 내가 본 배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진 배”라며 만족해 했다. 그는 곧바로 9척의 배를 새로 주문했다. 아산이 울산 미포만의 모래밭 사진 한 장과 5만분의 1 지도 한 장, 빌려온 유조선 도면 한 장을 가지고, 짓지도 않은 조선소에서 배를 만들겠다며 선주를 찾아 나선 지 2년 6개월 만의 일이었다.

한국 조선산업, 세계 속으로 출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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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중공업 1호선 명명식에서 그리스 선주 리바노스와 정주영 회장(1974. 6. 28) 출처 : 현대중공업

명명식 이후 석 달간 정밀점검을 한 뒤 10월 5일, 해상 시운전에 들어갔다. 약속한 인도일은 15일이었다. 선주가 정상 작동을 확신할 때까지 몇 날 며칠에 걸쳐 미비점을 거듭 보완했다. 그러던 중 보일러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보일러 튜브 교환은 물론 전면 수리에 들어가야 했다. 24시간 복구 작업을 한 뒤 다시 시운전에 들어갔다. 인도 일정이 늦춰지자 현장 지휘자였던 김영주 당시 현대중공업 부사장은 배 위에서 고사까지 지냈다. 선주국가인 그리스를 존중해 그리스 정교의 주교 사진을 앞에 두고 차려진 고사상이었다.

11월 27일, 드디어 로이드 선급협회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았다. 현대중공업 백충기 이사와 선주 대표 존 볼라보기로키스가 인도 서류에 서명을 마쳤다.

다음날 새벽 2시 30분. 한반도 영해를 벗어난 공해상에서 애틀랜틱 배런호가 선주에게 인도되었다. 대한민국의 조선산업이 세계 속으로 첫 출항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조선공업은 당시 경제 성장의 돌파구로써 정부가 추진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핵심산업이었다. 현대중공업 울산조선소의 탄생은 기계·금속·전기·전자 등 후방산업에 커다란 파급효과를 일으켰다. 조선소는 포항제철이 생산하는 철강의 주요 소비처가 되었으며, 수출 및 고용에 크게 기여해 한국 경제가 더 높이 도약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한국의 조선산업은 성장을 거듭해 2000년대 이후 지금까지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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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해하는 애틀랜틱 배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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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애플도어사와 조선소 건립 협의를 하는 정주영 회장 (1971년 9월) 출처 : 현대중공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