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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93년 삼성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한국경제의 결정적 순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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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내 말을 녹음하세요. 내가 질(質) 경영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이게 그 결과입니까? 나는 지금껏 속아 왔습니다. 사장과 임원들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모이세요.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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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을 하는 이건희 회장 (출처 : 삼성전자)

1993년 6월,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서울 비서진에게 전화를 걸어 200여명의 삼성 수뇌부를 소집했다.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로 모여든 임원진들을 앞에 두고 이 회장은 비장한 각오로 신경영을 선언했다. 일류 기업이 되려면 “양(量) 위주에서 질(質) 위주의 경영으로 변해야 한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강도 높은 변화를 주문한 것이다.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이후 삼성 그룹 전반의 체질을 바꾸어 놓았다.

신경영 선언의 배경

1990년대초 삼성은 D램 반도체 세계 시장 1위를 달성하는 등 국내 최정상 기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시기였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은 극심한 위기감을 느꼈다. ‘불량은 암이다’라고 말하며 꾸준히 품질을 강조했지만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3만명이 만들고 6000명이 고치러 다니는 비효율이 조직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이 회장은 지적했다.

미국 등 선진국 시장에서 경쟁사 대비 싸구려 제품 취급을 받는 삼성제품의 현실을 목격한 이 회장은 이대로 간다면 급변하는 글로벌 경영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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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영 선언 당시의 이건희 회장 출처 :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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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삼성전자 디자인 고문이었던 ‘후쿠다 타미오’ 출처 : 디자인삼성

신경영 선언의 도화선이 된 것은 ‘후쿠다 보고서’였다. 1993년 6월 4일, ‘후쿠다 타미오’ 당시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디자인 고문이 작성한 56장 분량의 보고서에는 삼성 디자인의 문제점과 임직원들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 담겼다. 이건희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서 후쿠다 보고서를 읽고 또 읽었다.

6월 7일, 설상가상으로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순간 이 회장에게 삼성 사내방송팀이 제작한 비디오테이프가 한 개가 보고됐다. 세탁기 조립 과정을 담은 이 비디오에는 세탁기 덮개 여닫이 부분 규격이 맞지 않자 근로자가 이를 칼로 깎아낸 뒤 대충 조립하는 장면이 찍혀 있었다. 이 회장은 다시 한번 격노했고, 이것은 신경영 선언으로 이어졌다.

퀀텀 점프의 기반이 된 신경영 실천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회의를 보름이 넘도록 이어갔다. 신경영 선언 이후에도 68일간 스위스, 영국, 일본으로 이동하며 임직원 1800여 명과 350여 시간의 회의와 간담회를 했다. 이를 풀어 쓰면 A4용지 8500장에 달한다.

삼성은 ‘라인스톱 제도’를 도입하며 질적 성장으로의 전환을 시작했다. 불량품이 나오면 즉시 해당 생산라인 가동을 중단하고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뒤 재가동하는 강경책이었다. 무선전화 사업부의 제품 불량률이 11.8%까지 오르자 불량품 15만대를 쌓아놓고 ‘불량제품 화형식’까지 치르며 품질 경영에의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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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불량품을 폐기하는 모습 (출처 :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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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불량품을 폐기하는 모습 (출처 : 삼성전자)

인사개혁도 단행했다. 혈연·지연·학연·성별 구분 없이 능력과 전문성에 입각한 공정한 인사 전통을 정착시켰다. 특히 최고수준의 S급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었으며 여성인재 등용에도 힘썼다. 신경영 선언 전부터 여성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이 회장은 여성 채용비율을 높이고 어린이집 등 인프라를 늘려 보육 부담을 줄였다.

이 같은 구체적이고 철저한 혁신을 통해 삼성은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자리매김 했다. 이회장의 신경영 강연내용은 언론에 대대적으로 방영되며 한국의 기업문화를 바꾸는 전환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