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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96년 SK 세계 최초 CDMA 서비스 상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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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유선전화와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감도가 깨끗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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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1월 24일자 신문에 실린 한국이동통신(현 SKT) CDMA 상용화 광고 (출처 : 동아일보)

1996년 1월 3일.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은 인천·부천 지역에서 세계 최초로 CDMA(2G) 이동전화 서비스를 개시했다. 첫 가입자가 된 정은섭 씨(여, 당시 36세)가 개통 후 첫 통화를 시도했다. “일반 유선전화와 별 차이가 없을 만큼 감도가 깨끗하네요.” 언론은 정은섭 씨의 말을 인용하며 전 세계로 한국이동통신의 CDMA 상용화 성공 소식을 전했다.

세계 통신업계는 CDMA 방식이 상용화에 실패할 것이라고 예상하며 초기 진척 상황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러나 1996년 말 국내 CDMA 서비스 가입자가 100만 돌파하고 원활하게 통신이 이뤄지는 것을 확인하자 마침내 CDMA 기술의 실용성을 확실히 인정했다. 대한민국이 세계 이동통신 업계를 선도하는 정보통신 강국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한국, 디지털 이동통신서비스 개발 경쟁에 나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내에 휴대용 이동전화 서비스와 휴대폰 보급이 시작됐다. 이동전화 가입자 수가 올림픽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기존 아날로그 방식 시스템은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통화품질이 불량하고 혼선, 통화가 끊어지는 일이 빈번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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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아날로그 방식의 국내 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 최초 단말기인 모토로라의 ‘다이나택 8000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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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8년 한국이동통신(현 SKT) 무선호출 10만 가입자 돌파 기념식 (출처 : SK텔레콤)

선진국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디지털 이동통신서비스 개발 및 상용화에 나섰다. 음성통화만 가능했던 1세대 아날로그 방식과 달리 2세대 디지털 방식은 고품질의 음성통화는 물론 문자메시지(SMS)와 데이터 전송까지 가능했다. 당시 세계 이동통신 시장의 대세는 유럽식 TDMA(시분할다중접속)인 GSM 방식이었다.

우리 정부는 선진국 통신사에 TDMA 기술이전을 요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우리나라가 원천기술 개발 능력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에 정부는 1989년 ‘디지털 이동통신 개발사업’을 국책과제로 선정하고 ETRI(한국전자통신연구원) 주도로 개발 계획 수립에 들어갔다.

CDMA 방식 상용화에 도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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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샌디에고에 위치한 퀄컴 본사 전경

1989년 미국의 벤처기업 퀄컴(Qualcomm)이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방식을 개발해 후발주자로 등장했다. 군사용으로 개발된 CDMA 방식은 주파수 활용 효율성이 높아 TDMA 방식보다 적은 기지국 수로도 아날로그 방식의 10배, 유럽의 GSM 방식보다 3배 이상 수용용량을 증대할 수 있었다. 통화품질과 통신보안 면에서도 TDMA보다 뛰어났다.

단점은 기술 구현이 까다롭고 상용화된 전례가 없어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이었다. 퀄컴은 자신들의 기술로 상용화 개발에 나설 파트너와 투자자를 찾아다녔으나 미국 이동통신업계는 TDMA 기술 개발에 이미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상황에다 위험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외면했다.

마침 마땅한 디지털이동통신 개발 사업파트너를 찾지 못했던 한국의 ETRI는 CDMA 기술검토에 나섰고 1991년 5월 퀄컴과 기술협력제휴를 맺어 CDMA 기술 상용화에 돌입한다. TDMA를 선택하면 외국 기술에 종속되나 CDMA를 상용화하면 원천기술 종주국이 되어 기술 자립을 이루고 향후 시장성 및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SK의 전폭적 지원, CDMA 개발을 견인하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아날로그 기술 기반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기술과 경험 부족, 공동개발에 참여한 국내 개발업체 간 기술 격차, 막대한 비용 및 민간출연금 분담으로 인한 갈등 등으로 시스템 설계와 개발이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CDMA 상용화 개발 사업은 연구비가 약 1000억 원에 달하는 초대형 연구개발사업이었다. 실패할 경우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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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선경의 한국이동통신 지분 매입 이후 열린 임시주주총회 (출처 : SK텔레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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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윤 체신부 장관(왼쪽)과 조병일 한국이동통신 사장(오른쪽)이 1994년 11월 18일 한국이동통신 중앙연구소에서 시험통화를 하는 모습 (출처 : SK텔레콤)

체신부는 1993년 9월 한국이동통신 산하에 ‘이동통신 기술개발 사업관리단’을 출범하고 서정욱 전 과학기술처 차관을 단장으로 임명했다. 서정욱 단장은 사업 재정비에 나섰다. ETRI와 업체간 공동개발 방식에서 국내업체 간 경쟁개발 체제로 전환했다. 개발에 성공하는 업체에 시스템 장비 공급 계약 우선권을 부여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94년 1월 선경(현 SK)은 국영기업인 한국이동통신을 공개입찰로 인수해 제1이동통신 사업자가 된다. 포항제철(현 포스코)과 코오롱 등이 참여한 신세기통신은 제2사업자로 선정돼 CDMA 상용화 경쟁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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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4월1일 대전 대덕연구단지 내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열린 CDMA 상용화 기념행사에서 이수성 당시 국무총리가 CDMA 이동전화 시험통화를 하는 모습 (출처 : ET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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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CDMA 상용화 서비스 성공 후 최종현 선경그룹(현 SK그룹) 회장(오른쪽 두번째)이 사은회를 여는 모습 (출처 : SK그룹)

선경은 구조조정 없이 한국이동통신 출신 직원들을 모두 안고 갔다. 불안해하던 직원들은 다시 CDMA 상용화 개발에 매진했다. 선경은 서정욱 단장에게 CDMA 연구개발비 100억 원을 내어주는 등 금전적 지원은 물론, 연구개발 지원팀을 편성해 생산업체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의 버그를 잡아내어 수정 보완하는 데도 적극 참여했다.

마침내 1994년 11월 18일, 선경의 한국이동통신(현 SKT)은 세계 최초로 CDMA 방식의 첫 시험통화에 성공한다. 다음 해인 1995년 한 해 동안 한국이동통신은 교환기, 단말기 개발, 기지국 설치 및 최적화, 시스템 최종 보완작업을 진행했다. 마침내 1996년 새해 연휴가 지난 1월 3일, 선경은 세계 최초 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전화 상용화 서비스를 개시했다. 우리나라가 이동통신기술 및 단말기 수입국가에서 수출국가로 퀀텀점프 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