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ENU

2. 1961년 한국경제인협회 창립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한국경제의 결정적 순간 등
기업활동과 관련된 컨텐츠들을 실었습니다.

“본회는 자유시장경제의 창달과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올바른 경제정책 구현과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촉진함을 목적으로 한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정관 1조-

사건사진

▲ 한국경제인협회 창립총회,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을 초대회장으로 추대(1961.8.16)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한국 사회가 발칵 뒤집히고 경제계에도 풍랑이 일었다. 5월 17일 열린 ‘한국경제협의회’ 회의에서는 원래의 안건 대신 ‘긴급운영위원회’를 진행해 ‘혁명 공약’ 내용을 살피고 협회의 입장을 정리했다.

‘한국경제인협회’의 모태가 된 한국경제협의회는 1961년 1월 10일 일본 게이단렌을 모델로 기업가 68명이 모여 출범한 재계 단체였다. 한국경제협의회는 1960년 4.19 시민혁명 이후 집권한 장면 정부에 적극 협조하며, 민주당 수뇌부와 정·재계가 함께한 종합경제회의에서 태백산종합개발계획, 차관 도입,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 등 경제 발전을 위한 기본 방향과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하던 차였다.

하지만 1961년 5월 22일, 혁명정부에 의해 모든 경제단체의 활동이 전면 중지됐다. 28일 새벽부터는 ‘부정축재자’로 몰린 대기업 대표들이 탈세 혐의로 잇따라 구속 수감됐다. 군부 내 일부 청년 장교들은 본보기로 이들을 총살하자는 극단적 주장도 내놓았다. 29일, 박정희를 위시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이들의 전 재산을 몰수하겠다고 공포했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전신, 경제재건촉진회 발족

한편, 최고권력자 박정희는 6월 하순 은밀히 기업가들을 만났다. 천우사의 전택보, 경방의 김용완, 강원산업의 정인욱 등이었다. 박정희를 비롯한 군부는 혁명공약인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기 위해 경제문제에 관한 재계의 조언이 절실했다. 군부가 추진한 화폐개혁이 실패하면서 극심한 사회 혼란이 벌어진 이후였다. 기업가들은 이 자리에서 박정희에게 한국의 발전 방향과 전략을 명쾌하게 제시했다. 이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은 박정희는 당시 일본에 있던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된 이병철 회장에게 귀국을 종용했다.

사건사진

▲ 한국경제협의회 발족, 초대회장에 김연수 삼양사 회장 추대 (1961.1.10)

사건사진

▲ 한국경제인협회, 기간산업건설계획을 제시 (1961.9.15)

6월 26일 밤 김포공항에 내린 이병철은 다음날 곧바로 박정희와 독대했다. 이병철은 당시 세법의 불합리함과 자유경제 원칙에 대해 피력하면서, 부정축재자로 지탄받는 기업인을 단죄하는 것보다는 그들을 경제건설의 일꾼으로 활용하는 것이 국가에 득이 된다고 박정희를 설득했다. 마침내 7월 13일, 구속되었던 기업가 13명이 전원 석방됐다.

박정희는 그 대가로 기업인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공장을 건립해 속히 부정축재를 속죄할 것, 경제단체를 만들어 국가재건에 기업인들이 앞장 서달라는 것이었다. 이틀 뒤인 7월 15일, 석방된 기업가 13명이 모여 ‘경제재건촉진회’를 결성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렸던 기업인들이 경제개발의 기수로 바뀐 순간이었다.

기간산업 건설, 외자도입, 국제협력에 돌입하다

경제재건촉진회란 명칭은 당시 유행한 재건촉진운동에서 따온 것이었다. 설립 취지문에는 이 회의 성격을 ‘기간산업 공장 건설을 위한 실천기구’라고 명시했으며, ‘외자도입’, ‘국제협력’ 등의 내용도 담겨있었다. 촉진회는 기간산업공장 건설계획안을 작성하는 한편, 부정축재 환수금을 공장을 지어 주식으로 납부하는 물납제로 개정해달라고 건의했다. 27개 기업주에게 부과된 벌과금은 총 378억 800만 환. 이 중 103억 400만 환이 삼성 이병철에게 부과됐다. 당시 국내 총 통화량의 50%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이를 그해 연말까지 불과 4~5개월 안에 완납하기란 불가능했다. 결국 군부는 물납제로 환수금 징수 방식을 바꾸어 주었다.

사건사진

▲ 민간경제교섭단 제1진

사건사진

▲ 외자도입 교섭을 위해 미국으로 출발 (1961.11.2)

숨통이 트인 회원 기업인들은 1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기간산업 중 시멘트, 비료, 전기, 제철, 화학, 섬유를 선정하고, 각 분야를 회원 기업들이 나눠 맡아 건설하기로 했다. 외자 도입을 위한 해외 출장 건의도 받아들여졌다. 5.16 이후 경제인의 첫 해외출장이었다. 한편 기간산업이 이들 회원기업에 의해 선점되고 촉진회와 군사정부 수뇌부 접촉이 잦아지자 협회에 속하지 않은 경제인들의 불만 여론이 팽배해졌다.

전경련, 수출드라이브의 제일선에서 한국경제를 이끌다

이에 경제재건촉진회는 8월 16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회원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명칭도 이때 ‘한국경제인협회’로 바뀌었다. ‘경제인’이란 단어를 쓴 것은 한학자이자 대한양회 회장인 이동준의 아이디어였다. 경제란 ‘경국제민經世濟民’ 또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준말로, 여기에 사람 인人자를 붙이면 ‘세상을 다스리고 국민을 고난에서 건지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니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는 것이었다.

사건사진

▲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에서 전경련 회원들이 박정희 의장 등 관계자들과 첫 삽을 뜨고 있다(1962.2.3)

사건사진

▲ 수출산업촉진위원회 발회식, 수출산업투자를 최우선으로 할 것을 천명 (1963.3.7)

초대회장으로 삼성 이병철 회장이 선출됐다. 박정희 의장과 맞대응할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부회장에는 조성철, 남궁련이 선임됐다. 협회는 재계의 단결을 위해 문호를 개방했고 회원 수는 점점 늘어나 1968년초 총 160명에 달했다. 종합경제단체로 성장한 한국경제인협회는 1968년 3월 28일 명칭을 ‘전국경제인연합회’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960~70년대 추진된 수출드라이브 정책의 제일선에 섰다. 기간산업 건설, 외자도입법 건의, 울산종합공업단지와 구로공단 건설 등을 주도했으며 민간경제계의 의견을 수렴해 정부에 전달하는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다. 명실상부한 재계 구심점으로써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오늘날 한국경제 발전을 이끌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