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우리 기업이 경제사에 남긴 영광의 발자취와
역경을 딛고 성장한 스토리를 연대기별로 담았습니다.
특징

1982년 충남 서산 간척사업 현장을 둘러보는 정주영 회장
(출처: 현대자동차)
산업합리화
1970년대 말 오일쇼크를 계기로 중화학공업 과잉·중복투자와 부실화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정부 특혜를 노린 기업 간에는 과도한 투자 경쟁이 일었습니다. 정부의 집중 지원을 받아 급속히 성장했던 기업들은 생산 설비를 과도하게 늘려 공장 가동률 저하와 매출 감소, 부채로 인한 자금난 등에 시달렸습니다. 정부는 산업 전반의 체질 개선을 위해 중화학공업 투자조정 및 산업합리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자동차, 건설중장비 등 부문에서 시장진입을 제한하고 계열기업 정리를 촉진하는 등 산업 전반에 구조조정이 시행되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견인하며 뚜렷한 성과를 냈던 많은 기업이 이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국제화 가속화
수출이 꾸준히 늘어 우리 기업들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는 한편, 세계화로 인해 국제적으로 자율, 경쟁, 개방의 기조가 퍼져 나갔습니다. 종래의 수출지원 위주의 정책에서 점차 수입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하자 우리 정부는 수입자유화를 본격화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민간투자의 자유화가 이루어지고 우리 기업들의 국제경쟁력이 강화되었습니다. 또한 공업발전법이 제정되면서 특정 산업에 대한 선별지원에서 벗어나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경쟁을 촉진하는 정부 정책이 추진되었습니다.
3저 호황
80년대 후반 전 세계적으로 저유가, 저달러, 저금리 현상, ‘3저 호황’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뜻밖의 수혜를 입었습니다. 유가가 떨어지면서 원자재를 만드는 비용이 낮아져 원가 절감을 통해 수출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졌습니다. 특히 중화학 공업품 수출이 급증하면서 중화학공업계 기업들이 막대한 무역수지 흑자를 낼 수 있었습니다. 금리가 낮아지면서 외채가 줄고 이자 부담도 줄어 우리 기업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투자와 생산에 나섰습니다. 이로 인해 80년대 중반 우리나라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연도
- 1980. 7.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삼보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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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청계천에 국내 최초 벤처기업 설립

1981년 삼보전자엔지니어링이 국내최초로 출시한 컴퓨터 SE-8001
(출처: TG삼보)
- 1980.11. 선경(현 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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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석유공사 인수 기업으로 선정되며 석유화학사업 진출

대한석유공사의 새로운 대표이사로 취임한 최종현 회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출처: SK그룹)
- 1981. 8. 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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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고’와 ‘프라이드’ 생산으로 재기 성공

1981년 출시한 봉고 코치 광고 (출처: 기아자동차)
- 1982. 4. 현대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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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간척사업 공사 착수

1982년 충남 서산 간척사업 현장을 둘러보는 정주영 회장
(출처: 현대자동차)
- 1982.12. 대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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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한자동차 경영권 인수

1983년 대우자동차 맵시-나 광고
- 1983.11.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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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반도체 개발 성공

1983년 삼성이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출처: 삼성전자)
- 1983.12. 쌍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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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성증권 인수 후 쌍용투자증권으로 상호 변경

옛 여의도 쌍용타워(현 신한금융투자 건물)
(출처: 한일엠이씨 홈페이지)
- 1988. 2. 금호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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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민항 사업자로 선정되어 서울항공(아시아나항공) 설립

1988년 12월 아시아나항공 지면광고 (출처: 금호아시아나)
- 1989. 3. 대농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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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리아헤럴드 인수하며 언론 영역 진출

대농그룹 창업주 故박용학 회장(1915~2014)

1981년 삼보전자엔지니어링이 국내최초로 출시한 컴퓨터 SE-8001 (출처: TG삼보)
1980. 7. 삼보전자엔지니어링(현 삼보컴퓨터) 서울 청계천에 국내 최초 벤처기업 설립
1980년 7월 2일,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서 자본금 1천만원으로 삼보전자엔진니어링이 설립되었다. 삼보는 7명의 직원으로 시작해 설립 6개월 만인 1981년 1월 국내 최초의 PC ‘SE-8001’을 개발한다. 전용 모니터도 없는 8비트 컴퓨터였지만 출시한 그 해 캐나다에 1,200대 가량을 수출하는 쾌거를 올렸다. 삼보의 행보에 고무되어 국내 컴퓨터 업계에 벤처 창업 붐이 일어났다. 삼보는 이후 1982년 사명을 삼보컴퓨터로 고치고 애플 호환 기종 개발에 이어 프린터 부문에도 진출해 4억9천만 원의 높은 매출을 기록했다.
1983년 벤처 캐피탈 지원 금융기관 ‘한국개발투자’가 삼보에 5억8천만원의 자본을 투자한다. 삼보는 이 자금으로 반월공단에 2천3백평 규모의 대지를 구입해 공장을 세웠다. 이를 계기로 삼보는 PC 전문업체로 급성장했다.
같은 해 정부는 선진국 대열에 오르기 위한 돌파구로 정보화 산업 육성계획을 추진한다. 그 일환으로 교육용 PC 보급 사업이 전개됐다. 이를 계기로 금성, 삼성, 동양나이론, 대우전자 등 대기업이 PC 시장에 진출했다. 삼보는 IBM뱅킹터미널을 만들었던 한국상역과 함께 교육용 PC 사업에 컴퓨터 제조기술을 독점 공급했다. 이 사업을 통해 삼보의 이름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국내 상업용 PC 시장이 형성되었다.

대한석유공사의 새로운 대표이사로 취임한 최종현 회장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 (출처: SK그룹)
1980.11. 선경(현 SK) 대한석유공사 인수 기업으로 선정되며 석유화학사업 진출
1980년 11월 29일, 정부는 대한석유공사(이하 유공) 인수기업으로 선경을 선정했다. 재계는 ‘새우가 고래를 먹었다’며 크게 술렁였다. 당시 선경의 총 매출은 1,000억원대, 재계 순위는 10위였다. 반면 유공은 1979년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매출액 1조 원대를 돌파한 초우량기업이었다. 9,300만 달러에 달하는 인수자금 동원 능력이 선경에게 있는지에 대해서도 재계의 의구심이 깊었다. 하지만 선경은 유공 민영화를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알 사우디 은행으로부터 1억 달러의 대부 보증서를 받아온 상태였다.
선경이 유공 인수기업으로 선정된 데는 선경과 중동 산유국 간의 깊은 유대관계가 컸다. 섬유기업으로 성장한 선경은 일류 기업으로 나아가기 위해 1973년 ‘석유부터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천명하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석유화학공장 설립을 추진한 바 있었다. 이 계획은 결국 무산되었으나 선경과 故최종현 회장은 그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및 야마니 석유상과 10년에 걸쳐 돈독한 신뢰 관계를 맺었다.
이 친교 관계는 1,2차 석유파동을 헤쳐 나오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 1차 석유파동 당시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한국이 아랍의 적대국인 이스라엘과의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유로 한국을 석유 수출 금지국 리스트에 올렸다. 위기를 타개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정부는 최종현 회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최 회장은 비공식 정부 사절로서 사우디로 날아가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설득을 거듭했다. 마침내 석유 공급 재개의 물꼬가 트이면서 한국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다.
이렇듯 독보적인 원유 도입 능력을 증명함으로써 선경은 유공 인수에 성공했으며 마침내 석유에서 섬유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의 숙원을 이뤄냈다.

1981년 출시한 봉고 코치 광고 (출처: 기아자동차)
1981. 8. 기아산업 승합차 ‘봉고 코치’ 출시로 재기 성공
제2차 오일 쇼크 이후 정부는 1981년 2월 28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를 단행한다. 이에 따라 현대자동차와 새한자동차가 승용차 생산을, 기아는 중·소형 상용차 생산을 독점하게 됐다. 수익성 높은 승용차 생산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서 위기를 맞은 기아산업(현 기아자동차)은 당시 기아기공 사장이었던 김선홍이 전문 경영인으로 사장 자리에 올랐다.
김선홍 사장 체제의 기아산업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중·소형 상용차를 독점 공급하게 되면서 경쟁 차종이 사라졌다는 점을 기회로 활용했다. 1980년 들여온 일본의 마쓰다의 1톤 트럭 봉고를 승합차로 개조해 1981년 8월 12인승 승합차 ‘봉고 코치’를 출시했다. 승합(미니버스)모델인 ‘봉고 코치’는 출시되자마자 ‘봉고 신화’라고 불릴 정도로 대히트를 쳤다. 봉고는 승합차를 통칭하는 대명사가 되었으며 1981년까지 누적적자 530억원에 달해 파산 직전이던 기아는 1982년 39억원 흑자로 전환했다.
1987년에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자 기아는 Y카 프로젝트를 통해 1987년 1월 ‘프라이드’를 출시했다. 설계는 마쯔다가, 생산은 기아차가, 판매는 포드가 전담한 국내 최초의 월드카였다. 프라이드는 ‘페스티바’라는 이름으로 자동차 본고장인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기아차 창립 43년 만의 극적인 쾌거였다.

1982년 충남 서산 간척사업 현장을 둘러보는 정주영 회장 (출처: 현대자동차)
1982. 4. 현대건설 서산간척사업 공사 착수
1979년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완공 후 현대건설은 해양 인프라 구축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만들어 나갔다. 국내 대표적인 사례가 1982년 4월에 시작한 서산간척사업 공사이다. 이 사업은 국가 식량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서해바다를 메워 옥토를 만드는 국토개발 프로젝트였다. 성공한다면 여의도의 30배, 남한 면적의 1%에 달하는 국토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었다. 서산간척사업은 국내 최초로 민간기업에 의해 실행된 대단위 간척사업이었으며, 당시 고도성장을 가능케 했던 우리나라 기업인들의 불굴의 개척 정신과 모험정신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서산은 물막이해야 할 곳의 거리가 멀고 간만의 차도 커서 일제강점기부터 수차례 간척사업 후보지에 올랐다가 번번이 탈락된 곳이었다. 조석 간만의 차이가 평균 조수량 3억 4,700만톤에 달할 정도로 컸으며, 유속도 매우 빨라 기존 공법으로는 천문학적인 공사비가 예상됐다.
이에 현대 정주영 회장은 유조선을 물막이 수단으로 이용하여 조수를 막아 놓은 상태에서, 현장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흑이나 버력으로 물을 막는 이른바 ‘유조선 공법’을 고안해냈다. 1984년 2월 25일 22만 6,000톤급의 대형 폐유조선 크리어워터베이 호를 이용해 ‘유조선 공법’이 실행되었다. 국내외 보도진은 이를 취재해 전 세계로 그 과정을 알렸다. 유조선을 이용한 끝막이 공법은 대성공을 거두어 280억원에 달하는 공사비를 절감했을 뿐 아니라 공사기한도 무려 36개월이나 단축했다.
서산간척사업은 1984년 2월 간척지공사 완료 후 순차적으로 정지작업과 제염작업을 진행해 1995년 8월 농림수산부로부터 정식 준공인가를 받아내 총 공사 기간 15년 3개월에 달하는 대장정을 마무리했다. 서산간척사업을 통해 약 1만 580ha의 농경지를 확보하였으며 연 50만 가마니의 쌀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1983년 대우자동차 맵시-나 광고
1982.12. 대우그룹 새한자동차 경영권 인수
대우는 1978년 산업은행이 보유한 새한자동차 지분 50%를 인수하면서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다. 미국 자동차회사 GM과 50대50의 지분을 유지해오다 1982년 12월 대우가 경영권을 맡기로 합의하고 다음해 사명을 대우자동차로 변경했다. 1980년 산업합리화 조치의 일환으로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단행되었다. 이에 따라 대우와 현대차 두 회사만 승용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경쟁 업체가 현대차 하나로 줄고, 수익성이 높은 승용차 생산을 전담하게 되면서 대우는 자동차 사업을 통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특히 대우는 페이스리프트(부분 변경)를 초기 전략으로 세웠다. 개발기간이 오래 소요되는 완전 신차보다 기존 제품의 상품성을 개선한 자동차 모델을 다수 출시한 것이다. 새한자동차 시절의 ‘제미니’를 개량해 ‘맵시(1982)’를, ‘레코드 로얄’을 개량한 ‘로얄XQ(1983)’ 등이 대표적 사례다. 이를 통해 대우는 경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판매량을 크게 끌어올렸다.
대우의 새한자동차 인수는 부실기업들을 인수해 사세를 확장하고 1980년대 정부의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에 적극 호응한 대표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대우는 옥포조선소를 인수해 조선업에, 대한전선의 가전사업을 인수해 생활가전 시장에 진출하였다. 해외 신흥 건설시장에도 거침없이 진출해 공사를 수주함으로써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이러한 행보로 대우는 1980년대 중화학 공업화를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83년 삼성이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출처: 삼성전자)
1983.11.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반도체 개발 성공
1983년 12월 1일. 삼성반도체통신 강진구 사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삼성이 64K D램 자체 개발에 성공했음을 알렸다. 1983년 3월 이른바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산업 진출을 전격 발표하고 개발에 착수한 지 불과 9개월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64K D램은 1983년 11월 개발된 삼성전자 최초의 반도체 생산 제품으로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발되었다. 새끼손톱 4분의 1 크기의 칩 속에 15만 개의 트랜지스터를 심어 800만개의 선으로 연결해 8,000자의 글자를 저장할 수 있는, 당시로서는 첨단 반도체였다.
삼성은 생산, 조립, 검사까지 309개 공정을 자력으로 개발해 완전한 기술 독립을 이루어 냈다. 선진국에 10년 이상 뒤처져 있던 우리나라 반도체 기술 수준을 4년 정도 앞당긴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이후 삼성은 반도체 신화를 써 내려갔으며 금성, 현대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며 삼성 추격에 나섰다.

옛 여의도 쌍용타워(현 신한금융투자 건물) (출처: 한일엠이씨 홈페이지)
1983.12. 쌍용그룹 효성증권 인수 후 쌍용투자증권으로 상호 변경
1975년 쌍용그룹의 창업주 김성곤이 사망하고 장남 김석원에게 경영권이 승계되면서 공격적인 사업확장이 시작되었다. 단기간에 복합기업집단을 형성한 쌍용은 1983년 9월 효성증권을 인수한 후 같은 해 12월 상호를 쌍용투자증권으로 바꾸었다. 증권회사 최초로 ‘투자’라는 용어를 상호에 사용한 사례였다.
1986년 12월 증권거래소에 상장한 쌍용투자증권은 국내 굴지의 증권사로 성장해 나갔다. 1991년 국내 최초로 대규모 M&A 중개(쌍용양회의 미국 Riverside 사 인수)를 맡았으며 투자은행(IB) 업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4년 한국전력의 주식예탁증서(DR) 뉴욕증시 상장과 1998년 국민은행 주식예탁증서(DR) 발행 주관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치며 기업금융의 선두자리에 올랐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쌍용그룹이 해체되면서 외국계 사모펀드에 매각돼 1999년 굿모닝증권으로 상호가 변경됐다가 2002년 신한금융지주가 지분을 인수해 2002년 굿모닝신한증권, 2009년 신한금융투자로 바뀌었다. 쌍용투자증권은 ‘증권업계 사관학교’로 불리며 선진 금융 노하우와 글로벌 경영체계로 업계를 선도해 회사를 거쳐간 많은 이들이 이후 금융투자시장의 리더 자리에 포진해 있다.

1985년 효성나스 설립기념 리셉션 (출처: 효성인포메이션시스템)
1985. 8. 효성 내셔널어드벤스시스템(나스)와 합작해 효성나스 설립
효성은 1979년 그룹계열사인 동양나이론에 전자사업부를 발족하고 구미에 국내 최초로 컴퓨터전문생산공장을 지었다. 효성은 첨단산업이 본질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국내 컴퓨터 시장에 참여해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컴퓨터사업을 강화하고자 1983년 전자연구소, 1985년 효성NAS, 1986년 효성히타치데이터시스템 등 컴퓨터전문회사를 잇따라 설립됐다.
1985년 8월 효성NAS(현 효성인포메이션)는 미국의 NAS(현 HDS)사와 동양나이론의 50대 50 합작 형태로 설립되었다. 당시 국내 중·대형 컴퓨터 분야에서 효성NAS는 국내자본이 참여한 유일한 기업이자 PCM(Plug Compatible Mainframe) 공급업체였다. 디스크, 테이프 등 한국 최초의 스토리지 토종 기업으로 시작한 효성나스는 1986년 설립 후 최초로 공공기관인 한국전력공사에 메인프레임 및 스토리지를 공급했다.
1980년대는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일반 사용자를 위한 소프트웨어가 본격 등장한 시기였다. 하드웨어 산업도 80년대에 발전을 거듭했다. 정부가 1983년을 정보 산업의 해로 선포하고 교육용 PC 보급 사업을 추진하면서부터 였다. 동시에 청계천 전자상가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이 개인용 컴퓨터를 조립해 판매하는 기술 시장이 자생적으로 형성되었다.

1988년 12월 아시아나항공 지면광고 (출처: 금호아시아나)
1988. 2. 금호그룹 제2민항 사업자로 선정되어 서울항공(아시아나항공) 설립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8년 2월 12일, 금호그룹이 제2민항사로 선정됐다. 대한항공 민영화 이후 19년 만에 국내 항공업계가 독점체제에서 복수경쟁체제로 전환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당시 교통부는 자본력이 있고 운송사업 경험이 많은 업체이되 대재벌을 제외했다고 선정 기준을 밝혔다. 금호는 1946년 전남 광주에서 택시 2대로 시작, 1948년 광주여객을 설립하고 1970년대에 금호고속을 발판 삼아 성장한 기업이었다. 재계 20위권이었던 금호는 아시아나항공 설립을 계기로 그간의 경영상 어려움을 만회하고 재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제2민항 사업자로 선정되고 닷새 뒤인 2월 17일, 금호그룹은 서울항공을 출범하고 같은 해 사명을 아시아나항공으로 바꾸었다. 1988년 12월에는 B737-400 항공기 1대를 첫 도입, 점차 국내선 운항 노선을 확대해갔다. 아시아나항공은 대한항공과 차별화된 서비스를 선제적으로 선보이며 항공운수 시장에 빠르게 안착했다. 이로써 금호는 택시, 버스, 항공까지 보유한 운수업계의 강자로 발돋움했다.
제2민항사 도입은 1980년대 후반 대내외 환경에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증가, 해외여행 자유화로 항공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냉전 화해 무드에 접어들면서 국제교역이 증대되었고, 항공산업 규제가 풀리면서 선진국을 중심으로 복수 항공 체제가 확산됐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관광객 등 항공 수요가 폭주할 것으로 전망되면서 대한항공 독점체제로는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여론이 컸다. 아시아나항공이 설립되어 대한항공과 차별화 경쟁을 벌이면서 90년대 항공운수업계는 황금기를 맞게 되었다.

대농그룹 창업주 故박용학 회장(1915~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