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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SK)

대한민국 경제를 성장·발전시켜온
한국 대표 기업인의 삶과 경영철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물

최종현

1929년 11월 21일 - 1998년 8월 26일
최종현

SK그룹의 선대회장으로, 대한민국의 에너지/화학 산업과 정보통신 산업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형 최종건이 운영하던 선경직물 경영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걸었던 그는 우리나라가 일등국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기술발전과 이를 통한 해외 자원개발, 그리고 인재양성에 집중해야 한다며 이를 과감하게 실천하여 섬유, 석유, 에너지, 이동통신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생애

1929 ~1959

  • 1929.11
    • 경기도 수원군 수원구 평동 출생
  • 1938
    • 수원 세류소학교 입학
  • 1944
    • 동성상업학교 입학
  • 1950.3
    • 수원농림고등학교 졸업
  • 1950
    •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화학과 입학 후 3년간 재학
  • 1954
    •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생화학과 3학년 편입
  • 1956.6
    • 미국 위스콘신 대학 생화학과 졸업
  • 1959.3
    • 미국 시카고 대학 대학원 경제학 석사학위 취득
  • 1959
    • 박계희와 혼인

1960 ~1969

  • 1962.11
    •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경영합류
  • 1966.6
    • 선경화섬 설립
  • 1969.2
    • 국내 최초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 준공
  • 1969.7
    • 선경합섬 설립

1970 ~1979

  • 1970
    • 선경그룹 사장 취임
  • 1972.11
    • 서해개발(현 SK임업) 설립
  • 1973.2
    • MBC <장학퀴즈> 후원 시작
  • 1973.11
    • 선경그룹 회장 취임
  • 1973.11
    • 금탑산업훈장 수상
  • 1974.11
    • 한국고등교육재단 설립
  • 1975
    • 선경연수원 개원
  • 1976
    • ㈜선경 수출1억불탑 수상, 종합무역상사 지정
  • 1977.8
    • 선경종합건설(현 SK에코플랜트) 설립
  • 1979.3
    • SK 고유 경영기법 SKMS정립

1980 ~1998

  • 1980.12
    •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 인수
  • 1987.3
    • 한국경제연구원 원장 선임
  • 1988
    • 유공, 예멘 마리브 유전에서 국내 최초 원유 생산
  • 1988.6
    • 유공(현 SK이노베이션)의 에틸렌·폴리올레핀 울산공장 건설현장을 시찰
  • 1991.4
    • 선경텔레콤(현 SK텔레콤) 설립
  • 1991.6
    • 울산컴플렉스 9개 신규공장 합동 준공식
  • 1993.2
    •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취임
  • 1994.7
    • 한국이동통신 인수
  • 1995.11
    • 국제경영학회(AIB)국제경영인상 수상
  • 1996.1
    • 세계최초 CDMA 이동전화 상용화
  • 1998.8
    • 별세
  • 1998.8
    •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주요사건과 업적

  • 동생은 유학파 형은 사업가, 각자의 길을 걷다

    최종현은 1929년 11월 21일 수원시 평동에서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예의범절이 바르고 학업에 충실했던 그는 1950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화학과에 입학, 1954년 5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위스콘신대학 생화학과를 졸업하고 시카고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해 1959년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당시 그의 형 최종건은 선경직물공장에서 기계기술자로 일하다 한국전쟁으로 공장이 폐허가 되자 1953년 회사를 직접 인수해 사업가의 길을 나선다. 최종건은 공장 복구와 품질개발에 밤낮으로 노력하여 1955년 산업박람회에서 ‘닭표’ 인조견으로 부통령상을 수상한다. 당시 양복 안감은 대부분 재단 전 물세탁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닭표 인조견은 곧바로 재단이 가능했기 때문에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도매상들이 공장에 직접 찾아와 기다리는 진풍경까지 연출된다. 이어서 1958년 출시한 화려한 무늬의 봉황새 수를 놓은 ‘봉황새 이불감’도 날개 돋친 듯 팔리며 선경은 호황기를 맞이한다.

  • 시작부터 남다른 타고난 사업가

    유학중이던 최종현은 칼럼리스트, 무역업, 국회의원 등 여러 미래 청사진을 그렸으나 ‘귀국하여 형의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은지 얼마되지 않아 1962년 부친이 작고하자 서둘러 귀국해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입사한다. 당시 선경의 경영상황은 종업원 임금이 4개월이나 체불될 정도로 악화돼 있었다. 선경의 거듭된 공장건물 증축과 생산설비 증설로 부채가 늘어난 와중에 내수시장은 공급부족에서 점차 포화시장으로 변해 수익성이 악화됐고, 4.19(1960), 5.16(1961)과 같은 혼돈의 정치상황도 생산활동과 상거래를 위축시켰다. 돌파구를 찾던 최종현은 시카고대학 동창의 초대로 간 미군의 크리스마스파티에서 우연히 다음해부터 미국이 원사수입 전용달러 원조금액을 줄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시중의 수입달러를 사들인다. 예상대로 미국은 원사수입 달러 원조를 절반 가량 감축했고 공급부족으로 인한 원사파동이 일어났으나 원사 매입달러를 충분히 확보한 선경직물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동시에 최종현은 정부의 수출 장려 방침에 발맞춰 해외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홍콩으로 건너가 한달정도 머물며 현지 수입업자들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레이온 능직 42만6천 달러어­­­치를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선경의 재무상황은 정상화되었으며 1963년 최종건 회장은 수출공로로 건국최초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한다. 최종현이 귀국한지 1년만에 일어난 일들이다.

  • 국내 최정상의 원사 제조사를 넘어

    선경직물은 크레폰, 앙고라, 깔깔이 등 신제품을 히트시키며 성공가도를 달렸으나 최종현은 직물공장만으로는 성장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1966년 최종현은 ‘선경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원사공장에서 봉제공장에 이르는 수직적 다각화를 목표로 아세테이트와 폴리에스텔 원사공장을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기술과 자본 모두가 부족했기에 내부적으로 실현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최종현은 일본의 ‘데이진’과의 합작투자로 기술이전과 차관유치에 성공하여 1968년 12월 아세테이트 공장을, 1969년 2월 폴리에스텔 공장을 차례로 완공해 국내 1위 원사 제조사로 자리매김한다. 선경의 다음단계는 화학섬유의 원료산업인 석유화학공업의 진출이었다. 1972년 정부로부터 제4정유공장 건설인가를 받고 1973년 선경유화와 선경석유를 설립해 정유공장 건설을 계획했다. 그러나 최종현이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원유공급 협상을 순조로이 끝내고 돌아온지 두 달만에 10월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석유파동으로 정유공장 건설계획은 중단되었고 11월 15일 최종건 회장이 49세의 나이로 폐암으로 급작스레 사망한다. 눈을 감기 전 선경그룹 첫 대졸 공채사원인 이순석 당시 선경합섬 차장에게 “종현이를 도와 꼭 석유사업의 꿈을 이뤄주게”라는 유언을 남긴다.

  • 석유에서 섬유까지, 형제의 꿈을 이루다

    형이자 믿음직한 동료였던 최종건을 보내고, 최종현은 1973년 11월 선경그룹 제2대 회장이 된다. 1975년 1월 신년사를 통해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천명하고 에너지〮종합화학기업으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최종현은 정유 공장 건설의 꿈을 안고 일찍이 중동의 국가및 실권자들과 관계를 맺어왔다. 1980년 2차 석유파동으로 대한석유공사(유공) 절반의 지분을 갖고 있던 걸프사가 유공에 대한 원유공급을 중단하고 철수를 결정하자, 정부는 서둘러 유공 민영화 계획을 발표한다. 여러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었지만 이미 원유 확보능력을 갖춘 선경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마침내 1980년 12월 선경이 유공을 인수함으로써 최종건, 최종현 형제의 꿈이 실현됐다. 최종현은 수직계열화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울산에 석유화학 콤비나트 건설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진행했다. 1986년 신규 방향족공장 준공, 1987년 에틸렌, 폴리올레핀공장 착공, 1988년 PO/SM 병산공장, OX/PX 병산공장을 착공하는 등 대단위 투자를 확대해 나갔다. 유공을 인수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입증한 최종현은 유전개발의 꿈까지 돌진한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의 꿈이었던 유전개발은 성공할 확률이 낮은 사업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1984년 북예맨 마리브 광구에서 석유를 발견, 1988년 1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마리브 유전에서 생산한 원유 35만배럴이 울산항에 입항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그의 선견지명은 이후 석유파동의 시대에 정부를 대표하여 직접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가 하루 5만 배럴의 석유를 한국에 공급하도록 만든다. 더불어 그간 쌓아 놓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와의 좋은 관계를 바탕으로 사우디 민간은행에서 1억 달러를 빌려, 당시 대한석유공사(이하, ‘유공’)의 일선에서 물러나기로 한 걸프만큼의 몫을 지급하므로 유공의 새 주인이 된다. 이후 유공은 ‘SK에너지’로 이름을 변경한 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표 기업으로 발전한다. 유공을 인수하면서 자신의 진가를 입증한 그는 유전 개발의 꿈까지 돌진한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 모든 사람의 꿈이었던 ‘유전’ 개발은 성공할 확률이 낮은 사업 분야임에도 불구하고 1984년 북예맨 마리브 광구에서 석유를 발견, 1988년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마리브 유전에서 생산한 원유가 울산항에 입항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 선경(SK)의 이름으로 일류를 향하여

    최종현은 일류기업이 되기 위한 선경만의 경영관리체계를 만들어 나간다. 1975년 초 경영원칙을 수립하여 경영기획실을 통해 경영관리 요소들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체계화하도록 지시하고 여기에 본인이 실제 기업경영을 통해 얻은 경험과 철학을 바탕으로 1979년 3월 SKMS를 완성해 세상에 내놓았다. SKMS(SunKyung Management System)는 선경의 직원 모두와 공유하는 경영원칙과 가치를 담은 집결체이다. 선경인이라면 갖춰야 할 기본자격을 ‘에스케이 맨십(SK Manship)’이라 칭하며 패기, 지식, 사교 자세, 가정 및 건강 관리 등 당시 세상 어떤 경영교과서에서도 가르치지 않았던 가치를 말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경제이론을 바탕으로 수십 년 동안 최종현이 직원들과 함께 끊임없는 경영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SKMS는 보통의 경영학자로서는 그려낼 수 없는 세계적인 기업경영이론이다. 이후 시대상황에 맞게 SKMS는 보완돼 오고 있으며 SK 고유의 기업문화를 넘어 시대에 필요한 가치를 선도적으로 제시해오고 있다.

  • 뚝심과 자신감으로 내린 결단, 한국이동통신 인수

    1980년대 초 최종현은 정보통신사업은 기존 기업들과의 중복투자를 피하고 국가산업에 기여할 수 있으며 글로벌시대에서 성장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진출을 결심한다. 1984년 미주경영기획실 내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발족해 사업관련 조사분석을 시작하고 유명 컨설팅사들과 협력하는 등 사업계획을 세워나갔다. 1992년 선경은 체신부가 실시한 제2이동통신 선정을 위한 경쟁입찰에서 최종 사업권자로 선정됐으나, 최종현이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사돈지간이라는 이유로 여론의 반발이 거셌다. 결국 최종현은 1992년 8월 기자회견을 열어 사업포기를 발표하고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은 다음 정부의 몫으로 넘어간다. 1993년 12월, 새로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2차 제2이동통신 신규사업자 선정과 동시에 제1이동통신인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를 추진한다. 체신부는 사업자 선정을 민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확정, 컨소시엄 구성을 전경련이 결정하도록 했다. 문제는 당시 전경련 회장이 최종현이었다는 것이었다. 또 다시 특혜시비가 일 것을 우려한 최종현은 제2이동통신 신규사업자 도전을 포기하고 대신 막대한 인수자금이 필요한 제1이동통신 민영화 입찰에 참여해, 1994년 7월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며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한다. 너무 비싼 인수가격을 치룬 것이 아니냐는 임원들에게 최종현은 “우리가 얼마나 이동통신 사업을 하기 위해 노력해왔나. 회사의 가치는 더욱 키워가면 되지 않나”고 답했다. 뚝심과 집념, 투철한 자신감이 있어야만 가능했던 일이다.

  • 국가와 경제의 잘못을 막는 것이 전경련 회장의 몫

    최종현은 1993년 2월부터 1998년 8월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제21대~23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최종현은 회장 취임 시 밝힌 전경련 운영방침에서 기업인의 첫째 의무는 기업활동임을 강조하고 자유로운 기업활동의 보장이 국가경제 발전의 길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임기 중 최종현은 재계의 결속과 단합을 훌륭하게 이끌어냈다. 경제계의 원로들을 명예회장이나 고문으로 추대하고 경영2세대들을 부회장으로 선임하여 회장단회의를 활성화시키는 동시에, 전문경영인 모임인 기조실장회의와 자율조정위원회를 구성·운영함으로써 기업간 화합에도 크게 기여했다. 각종 경제현안에 대하여 재계의 입장을 분명하게 개진하였으며, 특히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제2 이동통신사업자 선정에서 민간자율에 의한 컨소시엄 구성을 이루어냄으로써 민간경제계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한 바도 있다. 재벌규제라는 명목으로 소유분산과 출자총액제한을 내세운 정부에 대해 “기업에 대한 경제력 집중 문제를 규제하는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는 없다”고 비판하자 몇 달 뒤 SK는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 조사를 동시에 받기도 하였다. 직원들의 걱정과 원망에 최종현은 “국가와 경제가 잘못되는 것을 막는 것이 전경련 회장의 몫”이라고 답하였다. 최종현 회장은 1997년 IMF 직전 폐암 투병 중에서도 산소통과 산소호흡기를 단 채 2차례나 청와대를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을 독대해 경제 회생방안을 진언했다. 1998년 8월 운명할 때까지 대한민국 경제를 걱정한 재계의 큰 어른이었다.

  • 사람을 키우는 기업인

    기업 경영에 있어 늘 좋은 인재가 많길 소망하던 최종현은 1973년 2월 MBC 고교 퀴즈 프로그램 <장학퀴즈>가 제작을 위한 광고가 끊겨 존폐위기에 처해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장학퀴즈> 단독 광고주로 나서기로 한다. 프로그램 운영비 및 장원 학생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방송을 지속시켰다. 장학퀴즈를 통해 연을 맺게 된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며 멋진 일꾼이 되어주길 당부했다는 일화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경영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또 그는 1972년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설립해 충주의 인등산과 천안의 광덕산 등을 사들여 나무를 심어 가꾸는 일에 몰두했다. 산림사업을 통한 수익으로 장학사업의 장기적인 재원을 마련하고 국가의 산림녹화에도 기여하고자 한 것이다. 1974년 ‘한국고등교육재단’이라는 장학 사업 단체를 세우고, 세계수준의 학자를 양성하여 학문과 국가발전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그의 따뜻한 손길을 거쳐간 수많은 인재들이 오늘날 국내외 대학, 연구소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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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철학

최종현

플랜을 갖고 경쟁하는 것과 안 한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 유공인수, 정보통신산업 진출 등 남들은 운이 좋았다고 하는데 절대 운만으로는 큰 사업을 할 수 없습니다. 사업다각화를 위해 10년 이상 준비한 결과입니다.”

1997년 시사저널과 인터뷰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만들고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로 ICT 강국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여러 분야의 학자들, 재계의 인사들과 어울리며 대화하고 도전하고자 하는 분야에 관해 토론하기를 즐겼던 철저한 열정의 결과였다. 최종현은 남다른 혜안과 패기를 무기로 사업에 도전했으며 자본과 기술, 인재가 없었던 나라의 현실을 직시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원대한 목표를 향해 착실히 준비했다. 기업의 재산이 되는 인재양성부터 정부와의 공정한 협업을 위한 제언까지, 다방면의 발전을 도모하며 오늘날 기업가정신의 정석이자 시대의 표상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