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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 (한진)

대한민국 경제를 성장·발전시켜온
한국 대표 기업인의 삶과 경영철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물

조중훈

1920년 2월 11일 ~ 2002년 11월 17일
조중훈

한진그룹의 창업주입니다.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를 창업한 이래 50여 년을 수송보국(輸送報國) 한길을 고집하며 대한민국의 하늘길, 땅길, 바닷길을 열었던 그는 한국전쟁 이후 가난과 배고픔의 어려운 상황에서 빠른 시일 내에 산업 강국, 물류 수송 강국으로 성장시킨 수송계의 거목입니다.

생애

1920 ~1950

  • 1920.2
    • 서울 출생
  • 1935
    •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중) 2년 수료
  • 1937
    • 진해해원양성소 기관과 2년 수료
  • 1944
    • 김정일 여사와 결혼
  • 1945.11
    • 한진상사 설립

1951 ~1960

  • 1956.11
    • 주한 미8군과 군수물자 수송계약 체결

1961 ~1970

  • 1961.1
    • (주)한국항공 설립
  • 1961.8
    • 한진관광(주) 설립
  • 1966
    • 베트남 파견 미군과 군수 물자 수송 계약 체결
  • 1967.8
    •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졸업
  • 1967.9
    • 동양화재해상보험 인수
  • 1968.8
    • 한일개발(현 한진중공업) 설립
  • 1968.9
    • 학교법인 인하학원 이사장 취임
  • 1969.3
    • 대한항공 사장 취임

1971 ~1980

  • 1971.4
    •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 1972.2
    • 한진 회장 취임
  • 1973.3
    • 한불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 피선
  • 1973.4
    • 한일증권(현 메리츠증권) 설립
  • 1977.5
    • 한진해운 설립
  • 1977.7
    • 한불종합금융 설립
  • 1979.1
    • 학교법인 정석학원 설립
  • 1979.3
    • 한국항공대학 이사장 취임

1981 ~1990

  • 1982.5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꼬망떼르 훈장
  • 1982.9
    • 국산 전투기(제공호) 생산
  • 1987.4
    • 대한준설공사 인수
  • 1987.11
    • 대한선주 인수
  • 1988.3
    • 한진산업대학 설립
  • 1989.11
    • 한진정보통신 설립
  • 1990.6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그랑 오피시에 훈장

1991 ~2002

  • 1991.2
    • 21세기 한국연구재단(현 일우재단) 설립
  • 1996.5
    • 인하대병원 개원
  • 1998.3
    • 거양해운 인수
  • 1998.4
    • 독일 연방공화국 십자공로대훈장
  • 2002.11
    • 별세

주요사건과 업적

  • 기술을 익히며 성장한 청소년 시절

    1920년 2월 조중훈은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에서 4남4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휘문고보(현 휘문중) 재학 중 아버지의 포목점 사업이 어려워져 가세가 기울자, 어릴 때부터 공작과 기계에 남다른 소질이 있던 조중훈은 부모님의 짐을 덜고자 학교를 그만두고 진해에 있는 해원양성소에 들어가 기술을 익히는데 몰두해 2년 만에 해원양성소 기관과를 우등으로 졸업한다. 조중훈은 일본 고베의 후지무라조선소에서 일할 수습생으로 뽑혀 현해탄을 건너가 기술을 배우며 1940년 2등기관사 자격증을 받고 중국 톈진과 상하이, 홍콩, 동남아 각지로 항해했다. 객지에서 모은 밑천으로 사업계획을 세우던 조중훈 1942년 고국으로 돌아와 종로 효제동에 자동차수리 공업사를 차렸다. 밤낮 없이 일한 덕에 입소문이 퍼지면서 사업은 순탄한 듯 했으나 1943년 8월 조선총독부는 모든 물자와 사업시설을 군수지원체제로 편입시키는 기업정비령을 내리고, 정비공장은 군수업체에 넘어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는다.

  • 한 대의 트럭으로 시작한 운송회사

    1945년 해방을 맞이한 뒤 조중훈은 인천시 해안동에 ‘한진상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한 대의 트럭을 가진 운송회사를 세웠다. 일찌감치 운송업의 중요성과 장래성을 내다본 그는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화물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고 지역을 점점 넓혀 전국 각 지방을 오갔다.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그는 운송업과 함께 카바이드를 유통하는 일을 겸하며 사업을 시작한지 2년 만에 트럭을 열다섯 대까지 늘리게 된다. 해방으로 일제에서 벗어났으나 남북이 각각의 이념으로 맞서며 혼란스러웠던 상황에서 그는 ‘신용’을 최고 중심 가치로 두며 회사를 경영했고, 고객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소에 장비를 철저히 점검하는 일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50년 한진상사는 직원 마흔 명과 트럭 서른대, 화물운반선 열척을 보유한 탄탄한 운송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 1966년 국내 기업 최초로 국외 수송을 시작하다

    조중훈은 국내에서 쌓은 경험과 실력을 바탕으로 1966년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의 물품수송을 담당하는 사업에 뛰어든다. 수송사업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집념으로 수주에 성공한 한진상사는 첫해에 계약금 790만 달러를 따내며 국내 기업 사상 최초로 국외 현지수송을 시작했다. 전쟁 상황 속에서 ‘신속, 정확, 안전’을 강조했던 조중훈은 수시로 현장을 감독하였고 어렵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직원들을 다독였다. 그는 외교 및 대민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현지 베트남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하였고, 기술학교를 세워 무료로 기술을 가르쳤으며 베트남에 세워진 김치 공장에 베트남 여성들이 취업할 수 있도록 길을 내기도 했다. 한진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미군 용역사업으로 베트남에서 약 5년간 외화 총 1억 5,0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쾌거를 이루었다.

  • 국익을 생각하며 하늘길을 열다

    1968년 조중훈은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던 ‘대한항공공사(KAL)’를 맡아 달라는 정부의 제안을 고심 끝에 받아 들인다. 당시 항공공사는 20여 개의 국영기업 중 가장 큰 적자를 내며 정부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었다. 조중훈은 “만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 나가면서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게 기업의 진정한 보람이다”고 말하며 임직원을 설득하여 사업에 뛰어든다. 조중훈은 기업은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의 힘으로 발전됨을 강조하며 기존 대한항공공사 직원들을 한 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품었다. 고용안정과 함께 한진의 60%에 불과했던 항공공사 직원의 월급을 올려 상향평준화 하였으며, 당시로서 획기적인 성과급제를 도입하고 국내 최초 자녀학자금지원제도를 마련해 내부의 사기진작과 결속을 다졌다.

  • 1971년 태평양 횡단 노선 개설

    조중훈과 대한항공은 당시 한국 경제발전에 발맞춰 국제 활동의 길을 터주기 위해 오사카, 홍콩, 사이공 등을 중심으로 노선을 넓혀나가며 서울-오사카-타이페이-홍콩-사이공-방콕을 잇는 동남아 최장 노선을 개발해냈다. 이후 1970년대 초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국으로의 노선을 개발하는 일에 집중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과 미국 간에 맺어진 항공 운수 협정에 의해 우리의 비행기가 미국에 취항할 때 많은 제한이 있었으나 조중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숱한 협의 끝에 대한항공은 정식으로 취항이 가능한 미주 노선의 운항권을 획득해 냈다. 이후 대한항공의 직원들은 국내의 수출업체들을 찾아다니며 로스앤젤레스로 갈 화물들을 확보했고 1971년 마침내 태평양 횡단 노선을 성공시켰다.

  • 1973년 대한항공의 파리 취항을 허가합니다.

    조중훈은 길을 통해 전 세계가 하나로 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미주 노선 확보 이후 즉시 유럽의 도시에 취항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는 ‘한불 경제협력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에어프랑스와 협정을 맺고 공동 운영하는 방식을 고안한다. 이 시기에 정부로부터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등이 공동으로 제작한 에어버스 비행기를 구매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조중훈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이 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며 구매를 결정한다. 조중훈의 이와 같은 노력과 결단 아래 1973년 대한항공은 한국 민간 항공기 사상 최초로 서울과 파리를 잇는 항로에 화물기를 취항하게 되었다. 이후 더욱 공격적으로 노선을 개척해 나가며 대한항공은 민간 항공사로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아 세계의 주요 도시를 잇는 노선을 빠르게 구축한 선진 항공사로 성장했다.

  • 1977년 바닷길을 열다

    조중훈은 트럭 한 대로 한진상사를 시작하였듯, 1967년 노르웨이로부터 산 화물선 '오대호' 한 대로 '대진해운'을 설립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화물을 한꺼번에 실어나를 수 있는 해상 운송이야말로 우리나라의 미래사업이라고 여겼던 그는 컨테이너를 이용한 수송사업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는 컨테이너 전용부두가 없었기에 인천항 민자부두 사업에 뛰어드는 한편, 1972년 첫번째 컨테이너선 '인왕호'를 출항시키며 성장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얼마 못 가 1973년 석유파동을 겪으며 대진해운은 해체되고 만다. 조중훈은 좌절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꿈의 바닷길을 실현할 기회를 지속적으로 만들어내며 1974년 인천항 컨테이너 전용부두를 준공시키고 1977년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인 '한진해운'을 설립한다.

  • 1988년 국내 최초의 사내대학 설립

    조중훈은 인재를 양성하는 일에도 다른 사업 못지 않게 큰 신경을 기울였다. 그는 1988년 충분히 공부하지 못한 직원들을 위해 항공기계과와 항공전자과로 구성된 사내대학을 설립했다. 주경야독하는 직원들을 향한 남다른 애정을 가졌던 그는 1991년에 이르러서 한진그룹 전 직원을 대상으로 한 ‘한진산업대학(현 정석대학)’으로 규모를 확장하며 그룹 내 배움의 열풍을 만들어냈다. 좋은 인재를 잘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인재가 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것 역시 기업의 대표가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교육사업으로 국익에 힘을 보태는 것에도 뜻을 세웠다. 이후 인하학원, 정석학원, 한국항공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하며 인재를 키우는 일에 땀과 열정을 쏟아냈다.

  • 칸맞춤을 위한 빈 li

경영철학

조중훈

수송보국(輸送報國),
기업보다 나라가 먼저다

“길은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어. 아직 우리가 가지 않은 나라가 너무 많네”

조중훈은 평생토록 수송업에 집중하며 수송업을 통해 나라에 보탬이 되고자 했다. 사업을 진행하며 나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과감히 포기했고 국익을 위한 것이라면 어느 나라든 즉시 날아가 힘을 보탰다. 한국경제가 성장하는 시기에 땅과 바다 하늘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나라의 문을 여는 민간 외교관의 역할도 탁월하게 해내며 진정한 수송보국의 뜻을 이루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