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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976년 현대차 최초 국산차 포니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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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힘으로 만든 韓國最初(한국최초)의 고유모델車(차)「포니」 탄생”

1974년 10월 30일, 이탈리아에서 열린 제55회 토리노 국제모터쇼에서 현대자동차의 고유모델 1호 자동차가 첫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은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었다. 미쓰비시가 엔진 기술을 제공하고 차체 설계는 알도 만토바니가, 차체 디자인은 20세기 최고의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담당한 5인승 4도어 해치백 스타일의 소형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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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 출품된 포니(Pony) (출처 : 현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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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4년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출품된 포니 쿠페 컨셉트카 (출처 : 현대자동차)

반듯한 선과 간결한 면이 조화를 이룬 세련된 디자인의 포니에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성능, 경제성 등도 호평을 받았다. 조그만 차체에 미쓰비시의 4기통 1,238cc 새턴 엔진을 탑재한 포니는 최고속도 155km, 최대출력 80마력에 리터당 15km를 갈 수 있어 우수한 기동성과 연비를 뽐냈다. 함께 선보인 컨셉카 포니 쿠페 또한 종이접기를 연상케 하는 독특하고 스포티한 디자인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모터쇼 참가자들은 부품을 단순조립해 생산하는 수준이었던 현대자동차가 개발 착수 1년 6개월 만에 자동차를 완성해냈다는 점, 세계에서 9번째,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2번째로 국산화율 90%에 이르는 고유모델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독자 모델 개발이라는 승부수를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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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당시 포니 광고

1967년 현대자동차는 포드와 기술제휴 및 조립계약을 맺고 68년 11월부터 ‘코티나’ ‘포드 20M’ 등 라이선스 모델을 생산하며 종합 자동차 제조업체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1971년 현대차는 포드에 합작회사 설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난항을 겪었다. 현대는 지분 50대50의 합작을 제안했으나 포드는 그 이상을 원했다. 엔진 주물 공장 설립도 추진했으나 경영권과 기술이전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투자 가치, 자금 동원 능력 등 갖가지 이유를 대며 포드가 협상 조건을 거절하자 1973년 현대는 합작 투자계획을 취소하고 포드와 결별을 선언한다.

이후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고유모델 개발을 결단한다. “좁은 내수시장만으로는 자동차 산업을 영위할 수 없고 수출을 하려면 고유모델이 필수”라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국내시장 규모는 연간 1만 8,000대 선에 불과했다. 독자모델 개발을 만들어 국산화율을 높이라는 정부의 자동차산업 육성정책도 이러한 시도를 부추겼다. 하지만 독자모델 생산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현대차의 기술력은 포드 자동차를 단순 조립 생산하는 수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본금이 17억에 불과한 회사가 1억 달러 넘는 투자금을 마련한다는 것도 무모해 보였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뚝심으로 현대차는 1973년 3월부터 독자모델 개발에 착수한다.

1년 6개월간의 숨 가쁜 개발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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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니의 디자인 스케치 (출처 : 현대자동차)

1973년 봄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은 이탈리아로 건너가 차체 디자인을 맡길 회사를 물색한다. 여러 회사와 접촉 끝에 이탈디자인(Ital design)의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며 120만 달러라는 거액을 지불했다. 전 세계 투자자들을 찾아다니며 차관도 끌어왔다. 1974년 당시 영국 최대 자동차 회사 BLMC의 전무였던 조지 턴불을 부사장으로 영입해 개발 자문을 얻었고, 엔진과 변속기 등 기술적 부분은 미쓰비시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해결했다. 생산 현장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모터쇼용 프로토타입 디자인과 설계가 결정되자 1974년 4월 제작에 착수해 6개월 만에 포니를 완성해냈다.

차명은 1974년 7월 전 국민 대상 공모를 통해 결정했다. 5만 8000통에 달하는 응모엽서가 도착했는데 대다수가 아리랑, 유신, 무궁화, 새마을 등 시대적 분위기가 묻어나는 이름이었다. 1차 심사는 젊은층의 취향을 적극 반영하자는 취지에서 젊은 여대생들에게 맡겼다. 정치적, 민족적 성향이 짙은 차명은 별 호감을 얻지 못했고 다섯 차례의 심사 끝에 후보작에도 들지 못했던 ‘포니’가 추천됐다. 수출을 염두에 두고 해외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현대적인 이름이 필요했던 현대는 차명을 포니로 확정했다. 1974년 10월 토리노 모터쇼에 포니를 출품하기까지는 이렇듯 1년 6개월간 숨 가쁜 과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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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포니 생산라인 (출처 : 현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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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니 외관 (출처 : 현대자동차)

포니 자동차, 마이카 시대를 열다

성공적인 데뷔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현대는 1975년 12월 1일 울산에 연간 생산능력 10만 대 규모의 대규모 종합자동차공장을 세우고 시험생산 50대를 시작으로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생산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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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6월 첫 수출된 포니가 에콰도르 괴야킬 항구에 내리는 모습 (출처 : 현대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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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8년 11월 10만대 생산 돌파를 기록한 포니 (출처: 포니정 재단)

1976년 1월 26일. 마침내 포니가 정식 출시됐다. 4도어 해치백 스타일의 외관을 지닌 포니1의 당시 첫 출고 가격은 대당 227만3,270원이었다. 포니 두 대면 서울 시내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고가였으나 출시 첫해에만 국내에서 1만 대가 넘게 팔리며 시장점유율 1위(43.5%)를 차지했다. 이듬해에는 시장점유율이 54.1%로 올라가 81년까지 50% 넘는 점유율을 유지했으며, 출시 3년 째에는 연간 판매량 10만 대를 넘어섰다. 포니 출시 이후인 1979년 국내 자동차 시장규모는 8만9,000대로 급성장해 ‘마이카 시대’가 열렸다. 1976년 7월 에콰도르를 시작으로 캐나다 등 수출에 나서 ‘대한민국 첫 수출 승용차’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포니는 1990년 1월 단종될 때까지 총 29만 3,000대 누적 판매량을 기록했으며 국내 자동차 산업의 도약과 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2013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553호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