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우리 기업이 경제사에 남긴 영광의 발자취와
역경을 딛고 성장한 스토리를 연대기별로 담았습니다.
특징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소 착공식에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부총리(왼쪽부터) (출처: 포스코)
중화학공업화
정부 주도하의 전면적인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펼쳐졌습니다. 이에 따라 울산석유화학단지와 포항제철이 건립되었습니다. 자동차와 조선업도 본격화되었습니다. 경공업 위주의 제조업체를 운영하던 많은 기업이 이 시기 중화학, 중공업 분야로 주력 사업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기업들의 수출 비중에서 전자제품, 철강제품, 선박 등 중화학 제품이 40~50%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중동 건설 붐
제1차 석유파동으로 원유 가격이 폭등하자 중동 산유국들은 넘치는 오일 달러로 산업 인프라 시설 구축에 나섰습니다. 오일 쇼크를 벗어날 돌파구를 발견한 정부는 중동에 진출하는 우리나라 건설사들을 정책적으로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삼환기업을 필두로 중동 건설 붐이 일자 많은 건설기업들이 중동에 경쟁적으로 진출했습니다. 중동 특수로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인 기업들은 이를 국내 건설사업에 투자하는 한편, 사업 다각화에 더욱 과감히 나섰습니다.
종합무역상사 시대
우리나라 무역업자들이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해 수출에 문제를 겪자, 일본을 벤치마킹한 종합상사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정부는 종합상사로 지정된 기업에게 국제 입찰에서 우선권을 주고 수출 금융에서 낮은 금리를 적용하는 등 전폭적 혜택을 주었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앞다투어 종합상사 지정 요건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종합상사 1호 삼성물산을 필두로 종합상사로 지정된 많은 기업이 혜택을 누리며 급속히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사세를 불려나갔습니다.
연도
- 1970. 4. 포항제철(포스코)
-
- 포항 1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소 착공식에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부총리(왼쪽부터) (출처: 포스코)
- 1970. 7. 현대건설
-
-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금탑산업훈장 수상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식 (출처: 국가기록원)
- 1971. 6. 한국투자금융(현 하나은행)
-
- 국내 최초 순수 민간자본으로 단자회사 설립

1971년 6월 24일 한국투자금융주식회사 창립총회
(출처: 한국투자금융20년사)
- 1973.12. 삼환기업
-
- 한국 기업 최초로 중동 건설 공사

사우디 ‘알울라~카이바 고속도로’ (출처: SM삼환기업)
- 1974. 6. 현대건설
-
- 70만 톤급 도크 2기를 갖춘 울산조선소 준공

1974년 6월 28일 울산조선소 준공 (출처: 현대중공업)
- 1974. 한국화약(현 한화그룹)
-
- 방위산업체로 지정받으며 한국 대표 방산기업으로 성장

한화디펜스가 독자기술로 개발한 K9 자주포 (출처: 한화디펜스)
- 1975. 5. 삼성물산
-
- 국내 종합상사 1호 지정

1975년 11월 제12회 수출의 날. 삼성물산은 민간기업 최초로 2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
(출처: 삼성물산)
- 1976. 1. 현대자동차
-
- 한국 고유 모델 1호 자동차 ‘포니(Pony) 출시

포니 외관 (출처: 현대자동차)
- 1976. 대우개발(현 대우건설)
-
- 중남미·아프리카로 진출해 건설업 해외 신시장 개척

1980년 5월 29일 수단 타이어공장 완공식에서 김우중 회장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 1976.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구 대우중공업(주))
-
-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구 대우중공업(주)) 인수 및 중공업 진출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_인천공장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 1976. 2. 현대건설
-
- 중동 주베일항 공사 수주로 글로벌 건설사로 도약

공사에 쓰일 철구조물이 바지선에 실려 울산에서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으로 옮겨지는 모습 (출처: 현대건설)
- 1978. 3. 삼성
-
- 한국반도체 인수해 삼성반도체 설립

1970년대 한국반도체 부천공장 전경 (출처: 삼성전자)
- 1978. 대한조선공사(현 대우조선해양)
-
- 대한조선공사 인수 및 조선업 진출 (현 대우조선해양)

1973년 옥포조선소 기공식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 1979.12. 롯데
-
- 롯데쇼핑센터 개점

1979년 12월 개점한 서울 명동 롯데쇼핑센터 외관
(출처: 롯데그룹)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소 착공식에서 박태준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부총리(왼쪽부터) (출처: 포스코)
1970. 4. 포항제철(포스코) 포항 1기 설비 종합착공식
1970년 4월 1일, 포항 영일만에서 포항종합제철소 1기 설비 종합착공식이 열렸다. 부지조성, 설비 구매, 기반시설 구축 등 숨가쁜 준비 작업을 마치고 창립 2년 만에 제철소 건설 역사의 막이 오르는 순간이었다.
포항 1기 사업은 1973년 7월까지 조강(粗鋼) 연산 103만톤 규모의 종합제철공장 완공을 목표로 했다. 착공식 당일 공작정비공장 착공을 시작으로 시험검정설비, 열연공장, 후판공장 등 39개월간 공장 및 설비 착공이 잇따랐다. 당시 유사 이래 최대규모의 단일투자 공사였으며 내자 493억원·외자 711억원, 총 1,204억원이 투입되었다.
3년 후인 1973년 6월 9일, 마침내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만든 대형 용광로에서 시뻘건 쇳물이 터져 나왔다. 73년 7월 3일에는 제철 일관공정에 필요한 총 22개 공장과 설비 건설이 완료되었다. 포항 1기는 가동 첫해부터 1억 달러 이상의 흑자를 기록했다. 포항제철 공사에 들어간 총금액과 맞먹는 엄청난 액수였다. 260만 톤 규모의 2기 설비를 준공한 1976년 5월부터는 한국의 철강 생산 능력이 북한을 앞질렀다. 포항제철 설립은 우리나라 기초소재 산업과 중화학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준공식 (출처: 국가기록원)
1970. 7. 현대건설 경부고속도로 준공식에서 금탑산업훈장 수상
1970년 7월 7일 대구 공설운동장에서 경부고속도로 건설 준공식이 열렸다. 정부는 현대건설의 헌신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해 준공식 자리를 빌려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1960년대 후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막바지에 진행된 중점사업이었다.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연장 428km(4차선)의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단군 이래 최대의 건설공사로, 1968년 2월 1일 착공에 들어가 2년 5개월 만인 1970년 7월 7일 완공됐다. 건설에는 국내 16개 건설사와 육군 3개 공병대대가 동시에 참여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해본 경험과 기술이 있는 기업은 현대건설이 유일했다. 1966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공사와 경인고속도로 건설이 그것이었다. 두 번의 건설 경험을 통해 현대건설은 기술적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했다. 경부고속도로의 첫 구간이자 시범구간인 서울-수원 공사구역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높은 수준의 기술을 빠르게 전파하고 건설에 참여한 타 건설업자의 시공능력까지 끌어올렸다.
시공량에서도 현대건설은 압도적 비중을 차지했다. 총연장 428km의 약 30%에 해당하는 128km 구간이 현대건설에 의해 건설됐다. 32개의 장대교량 중 6개, 경부고속도로 건설에서 가장 어려웠던 대전공구의 당재터널 공사도 현대건설이 담당했다. 순수 공사비만 379억 3,300만 원이 소요된 이 건설사업에서 현대건설의 도급액은 약 23% 비중인 87억 9,600만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공사이익은 3억 3100만 원으로 이익률이 3.8%에 불과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만큼은 기업의 이해득실을 초월해 국가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건설에 임하겠다”는 정주영 사장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1971년 6월 24일 한국투자금융주식회사 창립총회 (출처: 한국투자금융20년사)
1971. 6. 한국투자금융(현 하나은행) 국내 최초 순수 민간자본으로 단자회사 설립
1971년 순수 민간자본으로 창립한 국내 최초 비은행금융기관이자 단자회사인 한국투자금융이 설립되었다. 단자회사란 기업의 단기자금 융통을 주업으로 하는 단기금융회사를 말한다. 한국투자금융이 탄생한 배경에는 1960년대 사채시장의 활황과 8·3 긴급조치가 있다.
1960년 후반 경제가 고도성장하자 기업들은 자기자본이 부족한 상태에서 외자도입과 사채에 의존해 경쟁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사채가 성행하자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100개 이상의 대규모 사채중개업소가 생겨났다. 당시 시중 사채 금리는 연 40~50%에 달했다. IFC(국제금융공사)와 한국개발금융(주)을 중심으로 기업의 단기자금 공급 문제와 금리 거품 해결을 위해 1971년 주식회사 형태로 한국투자금융을 출범한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물가상승, 환율 인상 등 고도성장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났다. 기업들은 외자도입에 의한 원리금 상환 부담과 고리의 사채 이자에 시달렸다. 국제수지 악화로 불황까지 찾아오자 기업들은 연쇄 도산 위기에 처했다. 결국 정부는 1972년 기업들에 대한 모든 사채를 동결한다는 8·3 긴급조치를 선언한다. 또한 ‘단기금융법’을 제정하고 사채 자금을 제도권 금융으로 흡수하기 위해 대기업에 단자회사 설립을 종용했다.
시중의 자금 거래가 단자회사로 몰리자 대기업들은 잇따라 단자회사를 설립했다. 한국투자금융은 국내 최초로 CMA(어음관리구좌)를 출시하는 등 단자업계의 선두에 섰다. 단자회사는 이후 투자금융으로 발전했으며 오늘날 제2금융권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사우디 ‘알울라~카이바 고속도로’ (출처: SM삼환기업)
1973.12. 삼환기업 한국 기업 최초로 중동 건설 공사
1973년 삼환기업은 국내 건설업체 최초로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울라-카이바 간 현대식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1973년 12월 공사를 시작해 총 길이 146km, 해발 700m 사막 고원지대에서 폭염과 용수난을 견디며 고생한 끝에 1977년 12월 4년만에 준공식을 치뤘다.
이 공사는 삼환기업에 500만 달러의 적자를 남겼다. 그러나 삼환기업이 특유의 성실함과 노력으로 예정된 기한 내에 현대식 도로를 건설해내자 한국 건설업에 대한 중동 국가의 신용이 크게 높아졌다. 첫 번째 수주 성공 이후 삼환은 사우디 제1의 도시인 제다市 미화공사, 사우디 방위사령부 및 사우디국립상업은행 본점, 사우디 왕궁 및 왕자궁 건설 공사 등을 수주하며 승승장구했다.
삼환이 중동 건설의 물꼬를 틀자 국내 기업들도 속속 중동에 진출했다. 중동 건설 붐이 일면서 해외 건설 연간 수주액은 1976년 25억 달러, 78년 81억 달러를 기록했다. 국내 건설기업들이 해외 건설로 벌어들인 달러는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74년 6월 28일 울산조선소 준공 (출처: 현대중공업)
1974. 6. 현대건설 70만 톤급 도크 2기를 갖춘 울산조선소 준공
1970년 6월 정부는 방위산업에 필수적인 4대 핵심공장 건설 계획을 세우고 현대건설에 대형 수출선 조선업을 맡겼다. 그러나 당시 현대를 비롯한 국내 기업들은 기술과 경험이 전무했으며 투자비 확보도 어려웠다. 그때까지 우리나라 수출선 건조 실적 최대규모는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가 건조한 1만7,000톤급이 고작이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만류에도 정주영 회장은 과감히 조선소 건설에 뛰어들었다.
1974년 6월 28일 현대건설은 약 60만 평 부지에 70만 톤급 도크 2기를 갖춘 울산조선소를 준공했다. 그때까지 현대건설이 수행한 단일 공사 가운데 최대 규모로, 총 1억 3,000만 달러가 투입되었다. 조선소 준공과 동시에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VLCC) 두 척이 건조되었다. 착공 1년 3개월 만이었다. 뒤이어 1975년 240만 톤급 드라이 도크 3기가 완공되면서 현대조선은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소로 발돋움했다.

한화디펜스가 독자기술로 개발한 K9 자주포 (출처: 한화디펜스)
1974. 한국화약(현 한화그룹) 방위산업체로 지정받으며 한국 대표 방산기업으로 성장
한국화약(현 한화)은 1960년대 국토개발사업이 한창일 때 경부고속도로 및 항만 건설, 광산을 캐는 광공업 등 곳곳에 산업용 화약을 공급했다. 한화는 그간 쌓아온 화약 제조 기술을 바탕으로 1972년 방위산업에 진출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의 연이은 대남도발, 닉슨 독트린에 의한 주한미군 철수 등 안보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 실현을 우선과제로 채택하고 무기 국산화와 방위산업 육성에 나섰다. 방위산업은 그 전제가 되는 중화학공업과 병행하여 육성되고 발전했다.
1974년 정부는 29개 방위산업체를 지정한다. 선정된 기업에는 공장부지를 제공하고, 진입도로 및 관련 인프라 건설, 설비자금 등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이 때 유수의 대기업이 방위산업체를 출범시켰으며 현재 이 기업들이 한국 방위산업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한국화약(현 한화그룹)은 1974년 방위산업체로 지정 받은 이후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인천공장에 방위산업용 특수폭약 제조시설을 갖추었으며, 국방과학연구소와 고폭탄류 공동개발에 착수했다. 1974년 방위산업의 기초소재인 나이트로셀룰로오스를 개발했으며 78년에는 여수공장을 신축해 특수 방산제품 생산을 본격화했다. 한국화약은 한국 대표 방산기업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후 정밀화학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1980년대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1975년 11월 제12회 수출의 날. 삼성물산은 민간기업 최초로 2억불 수출의 탑을 수상 (출처: 삼성물산)
1975. 5. 삼성물산 국내 종합상사 1호 지정
1975년 5월 19일, 삼성물산은 종합무역상사 제1호로 지정된다. 이후 전년 대비 456%라는 기록적인 수출 신장을 이루었다. 제12회 수출의 날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2억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으며 이듬해인 1976년에는 3억 불 수출탑을, 1977년에는 5억 불 수출탑을 수상하며 종합상사 수출 1위 3연패의 기록을 세웠다.
종합무역상사란 대규모의 자본력을 가진 무역업자를 뜻한다. 무역 거래 이외에 자원개발, 현지 생산 판매, 합작 투자 등 다각적 기능을 수행한다. 1970년대 우리나라 무역업체들은 매우 영세하였고 전문성이 떨어져 해외시장 변화에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기존 수출 제도의 한계를 타개하기 위해 일본의 종합상사 제도를 벤치마킹했다. 종합무역상사 지정 조건은 해외지사 10개, 수출국 10개, 자본금 10억 원, 연간 수출실적 5,000만 달러 이상이었다. 당시로서는 매우 엄격한 기준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성장한 주요 대기업들만 참여할 수 있었다.
종합상사 지정 기업들은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국제 입찰 경합에서 종합상사를 우선 지원하고 수출 금융에서 월등히 낮은 금리를 적용하는 등이었다. 종합상사제도는 수출 증대를 가져옴으로써 한국 경제 성장을 견인했다.
삼성물산을 시작으로 대우, 쌍용, 국제, 한일합섬 등 1978년까지 총 13개 종합상사가 탄생했다. 기업들은 종합상사를 매개로 인수, 합병, 신설에 박차를 가해 재계 판도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포니 외관 (출처: 현대자동차)
1976. 1. 현대자동차 한국 고유 모델 1호 자동차 ‘포니(Pony) 출시
현대자동차는 2년간(1970~1972) 추진했던 포드와의 합작회사 설립이 무산되자 73년 초부터 국산 자동차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엔진, 변속기 등 기술적 문제는 일본 미쓰비시와의 라이선스 계약을 통해 해결했다. 설계와 디자인은 이탈리아 자동차 디자인의 거장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차체 설계는 알도 만토바니에게 의뢰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 ‘포니’는 1974년 55회 이탈리아 토리노 모터쇼에서 데뷔했다. 후륜구동 방식에 미쓰비시의 4기통 1,238cc 새턴 엔진, 4단 수동변속기를 얹은 4도어 패스트백 소형차였다. 포니 개발 성공으로 한국은 세계에서 열여섯 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자동차 고유모델을 가진 나라가 됐다. 조랑말을 뜻하는 ‘포니’라는 이름은 현대자동차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공모한 이름이었다.
1975년 말, 현대자동차는 ‘포니(Pony)’의 시험생산에 들어가 이듬해 1976년 1월 26일 정식 출시 됐다. 포니의 출고가는 대당 200만원이 넘어, 당시 서울 강남 아파트 한 채 가격과 맞먹는 고가였지만 첫해에만 1만726대가 팔렸다. 1976년 남미 에콰도르에 다섯 대를 수출하면서 `대한민국 첫 수출 승용차`라는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국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포니는 자동차 문화의 상징성과 역사성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등록문화재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1980년 5월 29일 수단 타이어공장 완공식에서 김우중 회장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1976. 대우개발(현 대우건설) 중남미·아프리카로 진출해 건설업 신시장 개척
섬유 수출로 큰 성공을 거둔 대우실업은 1973년 대우개발(현 대우건설)을 설립했다. 해외시장 진출 본격화를 위해 건설업이 꼭 필요하다는 판단이었다.
1970년대 ‘중동 건설 붐’이 일자 건설업 후발주자인 대우는 중동 대신 1976년 남미 에콰도르 '퀴토시 도로포장 공사'를 시작으로 1977년 수단,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시장에 진출했다. 한국업체가 진출하지 않은 나라 중 땅이 넓은 나라(수단), 인구가 많은 나라(나이지리아), 자원이 풍부한 나라(리비아)를 우선 공략한 것이다.
종합상사인 대우는 자금력이 부족한 신흥국가와 거래하며 공사대금 대신 수단에서는 면화(원면), 리비아에서는 석유 등 자원을 받았다. 그리고 이를 국제 시장에 팔아 현금화하는 기발한 방식으로 공사대금을 회수했다.
대우는 리비아에서만 총 200건의 공사를 수행하는 등 아프리카에서 크게 활약하며 글로벌 건설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활약은 훗날 한국과 수단, 리비아 등의 국교 수립에 디딤돌이 되었으며,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_인천공장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공사에 쓰일 철구조물이 바지선에 실려 울산에서 사우디 주베일 산업항 공사현장으로 옮겨지는 모습 (출처: 현대건설)
1976. 2. 현대건설 중동 주베일항 공사 수주로 글로벌 건설사로 도약
1975년 7월, 현대는 사우디아라비아 동부 유전지대인 주베일에 산업항 건설공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육지에서 12km 떨어진 수심 30m 바닷속에 36m 높이의 철탑 89개를 세워 산업항구를 짓는 공사였다. 총 공사 금액은 무려 9억 6,000만 달러에 달했다. 입찰에서 현대건설은 44개월이 걸리는 공사기간을 8개월 단축하고, 12억 달러가 드는 공사비를 9억3천만 달러만 받겠다고 적어내어 1976년 2월 사업을 따냈다.
현대건설은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바다 밑에서 철탑을 만들어 올리는 대신, 울산 현대조선소에서 철탑을 만들어 주베일 앞바다까지 19번을 왕복해 철탑을 실어 날랐다. 원가는 획기적으로 낮아졌으며 공사 기간도 약속한대로 8개월이나 단축했다. 현대건설은 20세기 최대의 공사라 불리는 주베일 산업항 공사 수주를 계기로 세계적 건설회사로 발돋움했다. 이후 중동 전역에서 잇따라 공사를 수주하며 중동 건설 붐의 정점을 찍었다.

1970년대 한국반도체 부천공장 전경 (출처: 삼성전자)
1978. 3. 삼성 한국반도체 인수해 삼성반도체 설립
삼성은 1974년과 1977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반도체의 지분 50%씩을 인수한다. 1974년 설립된 한국반도체는 국내 최초로 웨이퍼부터 패키징까지 일괄공정을 시작한 기업이었다. 설립 첫해 전자손목시계용 IC칩을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지만 1973년 말부터 시작된 제1차 석유파동으로 부도 위기에 몰렸다.
1978년 3월 삼성은 한국반도체를 삼성반도체로 상호를 바꿨다. 하지만 자체 기술이 없어 사업 실적이 신통치 않았다. 삼성반도체는 자본금만 날리는 그룹의 미운 오리 새끼가 되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1970년대 초반 제1차 오일 쇼크로 경영난을 겪으며 앞으로 삼성이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 특히 일본이 오일 쇼크에도 불구하고 무역흑자를 기록하는 데는 반도체 산업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삼성반도체 설립은 과감한 선행투자였으며 나중에 삼성 반도체 신화의 씨앗이 되었다.
한편 1979년 럭키금성(현 LG) 그룹이 대한반도체를 인수해 금성반도체를 설립하고, 1983년 현대그룹이 현대전자를 설립하면서 한국 반도체산업 중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1973년 옥포조선소 기공식 (출처: 대우세계경영연구회)

1979. 4. 율산그룹 중동 건설 붐 퇴조와 함께 도산
율산은 1975년 창업 첫해 중동에 시멘트 등 건축자재를 수출해 340만 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율산은 곧바로 신진알미늄을 인수하며 제조업에 진출한다. 이를 시작으로 금룡해운, 동원건설 등을 인수하며 해운업, 건설업, 패션업 등 끝없이 사업분야를 넓혀 나갔다. 1977년에는 1억6500만달러의 수출 실적을 올려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며 1978년에는 종합무역상사로 지정 받아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율산은 창업 4년 만에 14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대기업으로 성장하며 ‘율산신화’를 써내려 갔다.
그러나 절정기를 누리던 1978년, 몰락이 시작되었다. 주 수출국인 사우디와의 마찰이 과장돼 자금시장의 신용도가 하락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가 ‘8·8 부동산투기 억제 조치’를 취해 건설경기가 침체에 빠지면서 율산은 극심한 자금난에 부딪쳤다. 주요 수출 품목인 시멘트 등 건축자재 수출까지 돌연 금지되었으며 중동 건설 특수의 퇴조도 한몫 거들었다.
율산은 수출 금융을 얻어 자금난을 타개하고자 부실기업들을 무리하게 인수하다가 부실 규모를 키웠다. 79년 4월 신선호 회장이 업무상 횡령 및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었다. 사흘 후 율산그룹 전 계열사가 일괄 부도처리되면서 율산그룹은 순식간에 공중분해 되고 말았다.

1979년 12월 개점한 서울 명동 롯데쇼핑센터 외관 (출처: 롯데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