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우리 기업이 경제사에 남긴 영광의 발자취와
역경을 딛고 성장한 스토리를 연대기별로 담았습니다.
특징

2005년 3월 31일 GS그룹 출범식에서 허창수 회장이 사기를 흔드는 모습 (출처: GS그룹)
닷컴버블 붕괴 및 IT산업 성장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황금기를 맞았던 국내 벤처산업은 2001년 전 세계에 IT 버블이 꺼지면서 조정기를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벤처 붐 시기 뿌려진 씨앗을 통해 네이버, 다음, 넥슨, 엔씨소프트 등 벤처기업이 탄생했으며 이들 기업은 2000년대를 거치며 현재 우리 경제를 견인하는 IT 대기업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국내 이동통신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채택되는 등 IT 기술에서 선진국보다 앞서 나가면서 2008년 글로벌 금융·경제위기 극복에도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탄생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 자본시장이 전면 개방되고 한국기업의 해외 진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우리 기업들은 국제화 시대에 걸맞게 기술 고도화를 추구하고 신기술 도입을 통해 신사업을 개척했습니다. 또한 양적 성장에서 질적 발전으로 전략을 바꾸어 품질혁명, 디자인경영 등을 펼친 결과 2000년대 초부터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국내 대기업들이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2008 글로벌 금융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강타했습니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IMF 이후 10년 만에 새로운 위기와 도전을 맞았습니다. 외환위기 때와는 달리 글로벌 금융위기는 세계 경제의 동반 침체 현상을 수반해 수출증대를 통한 위기 극복이 어려웠습니다. 이로 인해 환율이 폭등하고 주가가 폭락하는 등 외화유동성 위기가 닥치자 외국자본이 국내에서 빠르게 빠져나갔고 우리 기업의 주요 수출 상대국인 미국 등 선진국 시장의 급격한 위축으로 수출이 급감했습니다. 우리나라 금융·외환시장은 미국·일본 등 우방과 통화스와프 협정을 통해 가까스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연도
- 2000. 1. 하이마트(현 롯데하이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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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전 유통시장에 등장해 전자 유통혁명 시작

2002년 하이마트 TV광고
- 2000. 4. SM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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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엔터테인먼트사 최초로 코스닥 상장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이수만 (출처: SM엔터테인먼트)
- 2000. 7. 메가스터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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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 및 온라인 강의 대중화

메가스터디 창업자 손주은 강의모습 (출처: 메가스터디)
- 2001. 3.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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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중공업을 인수하며 발전, 담수, 주단조 및 건설분야의 새로운 도약 마련

한국중공업(現 두산에너빌리티) 창원공장 전경(출처: 두산그룹)
- 2000 ~ 2002. 포스코, 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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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10. 포스코 민영화
- 2002. 5. KT 민영화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광화문 사옥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2002.10.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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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iN 서비스 론칭

2003년 네이버 광고
- 2002.12. 한화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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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생명 인수하며 종합금융기업으로 변신

한화생명 63빌딩 전경 (출처: 한화그룹)
- 2003. 3. L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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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기업 최초 지주사 체제로 전환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출처:LG그룹)
- 2004. 8. 한성항공(현 티웨이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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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비용 항공사 설립

한성항공이 보유하던 ATR-72기종
- 2005. 3. GS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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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G와 아름다운 이별 후 독자 그룹 출범

2005년 3월 31일 GS그룹 출범식에서 허창수 회장이 사기를 흔드는 모습
(출처: GS그룹)
- 2006.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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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도TV 출시해 소니 꺾고 세계 1위

보르도 LCD TV (출처: 삼성전자)
- 2007. 5. 포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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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로 파이넥스(FINEX) 설비 준공

포항의 파이넥스공장 전경 (출처: 포스코)
- 2007. 11. 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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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잉거솔랜드社 밥캣 등 3개 사업부를 인수하며 건설기계 분야 세계 7위로 부상

밥캣 로더 (출처: 두산그룹)
- 2008. 3. 아모레퍼시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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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 쿠션 파운데이션 출시

세계 최초의 쿠션 파운데이션 제품 에어쿠션® (출처: 아모레퍼시픽)

2002년 하이마트 TV광고
2000. 1. 하이마트(현 롯데하이마트) 가전 유통시장에 등장해 전자 유통혁명 시작
2000년 1월 하이마트의 출범은 전자제품 유통시장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하이마트는 과거 대우전자의 국내영업 부문에서 분리되면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국내영업 부문 판매본부장이던 선종구 회장은 1999년 사명을 ‘하이마트’로 바꾸고 새롭게 출발했다. 국내외 유명 브랜드 제품을 모두 취급하는 가전제품 전문점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1990년대까지 국내 가전 유통시장은 대기업 제조사의 대리점이 전체 시장의 80~90%를 지배하고 있었다. 독점적인 유통구조로 인해 대기업 제조사가 시장가격을 일방적으로 책정할 수 있었고, 대기업의 대리점에서는 자사 브랜드 제품만 취급해 소비자들이 제품을 비교 구입하기 어려웠다. 카테고리 킬러로 변신한 하이마트는 제조사와의 직거래를 통해 제품의 판매가격을 파격적으로 낮췄으며 수많은 브랜드의 제품들을 한 매장에서 취급했다. 여러 브랜드가 품질과 가격으로 치열하게 경쟁하게 되면서 공급사(제조사) 위주의 시장이 소비자 중심 시장으로 바뀌었다. 소비자들은 국내외 품질 좋은 브랜드 제품을 한자리에서 편리하게 비교하고 합리적인 가격에 제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하이마트의 등장은 중소 가전사의 자체 브랜드 시대를 이끌었다. 대기업이 주문하는 상품을 만들어 납품하는 OEM 생산업체에 머물렀던 중소기업들은 자체 브랜드를 개발해 하이마트에 제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쿠쿠, 쿠첸, 위니아만도 등 우수한 품질을 가진 중소전자 브랜드들이 하이마트 매장에 제품을 납품해 판매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하이마트는 국내 가전제품 유통시장을 선도하는 국내 1위 가전전문점으로 자리매김했다. 2016부터는 자체브랜드(PB) ‘하이매드(HIMADE)’도 운영하고 있다.

SM엔터테인먼트 창업자 이수만 (출처: SM엔터테인먼트)
2000. 4. SM 엔터테인먼트 국내 엔터테인먼트사 최초로 코스닥 상장
SM엔터테인먼트는 한국 엔터 업계 최초로 K-Pop을 산업화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그룹이다. 창립자 이수만은 1972년 가수로 데뷔, 가수 겸 MC, 라디오 DJ로 큰 인기를 누렸다. 1981년 8월, 미국 케이블 TV에 24시간 뮤직비디오를 방송하는 MTV 채널이 개국한다.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이수만은 MTV 뮤직비디오 스타일과 미국 팝스타들의 강렬한 퍼포먼스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수만은 음악시장이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 시대로 전환되고 있음을 포착했다. 미국처럼 한국에도 전문 프로듀싱 시스템을 도입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컴퓨터공학 석사과정을 끝마치고 85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89년, 이수만은 SM 기획을 설립하고 기획가수 1호 ‘현진영과 와와’를 데뷔시킨다. 바비 브라운을 모델로 한 비디오형 힙합가수였다. 이후 이수만은 95년 주식회사인 SM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한국 엔터 업계 최초로 현재 ‘CT(Culture Technology: 문화기술)’라고 부르는 체계적인 ‘스타 시스템’을 구축했다. CT란 한 기획사 내에서 캐스팅, 트레이닝, 프로듀싱, 매니지먼트까지 4가지 핵심 프로세스의 전문가들이 유기적으로 일하고 시너지를 일으켜 스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SM의 1세대 아이돌그룹 H.O.T와 SES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SM의 시스템은 엔터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2000년 4월 27일 SM은 국내 엔터테인먼트사 중 최초로 코스닥 시장에 상장했다. 당시 SM의 자산은 95억원, 매출액 125억원 규모였으며 사업의 확장성과 지속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시 엔터 기획사들은 영세한 규모의 1인 기획사가 대부분이어서 산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코스닥 시장은 다양한 신성장 업종을 육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상장을 허용했다.
이후 엔터테인먼트는 하나의 산업으로 발돋움해 점차 대형화됐다. SM의 코스닥 상장은 자본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영화, 드라마 등 미디어 시장의 전 분야로 사업다각화를 가능케 했다. SM은 홀로그램 콘서트, 메타버스 등 IT를 결합한 혁신적 콘텐츠를 시도해 글로벌 한류와 K-콘텐츠 시장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

메가스터디 창업자 손주은 강의모습 (출처: 메가스터디)
2000. 7. 메가스터디 설립 및 온라인 강의 대중화
온라인 교육 전문기업 메가스터디는 2000년 7월 강남 대치동의 스타강사였던 손주은, 조진만, 이범의 공동대표 체제로 설립되었다. 당시 온라인 강의 서비스는 전자칠판을 통해 강사의 음성과 판서 내용을 녹화한 뒤 GVA 형식의 파일로 제공하는 초보적인 방식이 대다수였다.
손주은과 이범은 1999년부터 유니텔에서, 조진만은 ‘온스터디’에서 온라인 강의를 하였는데, 2000년 상반기부터 온라인 교육 사업의 전망에 대해 의견을 나누던 세 사람은 의기투합해 메가스터디를 설립했다. 손주은의 동생이자 창업 동기인 손성은(당시 부사장)은 신세기 통신에서 엔지니어로 근무한 경험을 살려 메가스터디의 초창기 온라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리고 대치동의 특급 강사들로 강사진을 구성해 오프라인 강의에 비해 집중도가 떨어지는 온라인 강의의 한계를 강사진의 역량으로 극복해 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다.
2000년 9월 첫 온라인 강의 서비스를 시작해 초고속 인터넷이 빠른 속도로 보급된 2001년부터는 고화질 온라인 강의를 제공했다. 수강생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설립 이듬해인 2001년 연 매출 43억원을 기록했다. 2004년 코스닥에 상장했으며 2007년 시가총액이 2조 원을 넘어섰다. 2008년 6월에는 코스닥시장 시가총액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메가스터디는 온라인 강의를 대중화했으며 온라인 교육 시장의 성공모델이 됐다. 또한 강사들을 회사의 주주로 참여시키고, 기본급 없이 수강료의 상당 부분을 강사에게 수익으로 배분하는 인센티브 체제, 강사 회의를 통해 강의 기획 및 개선점 등을 토론해 회사 운영에 반영하는 등 체계적인 경영 시스템을 일궜다. 이후 메가스터디는 편입학, 공무원 시험 등 성인교육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나갔으며 다수의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했다.

한국중공업(現 두산에너빌리티) 창원공장 전경(출처: 두산그룹)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광화문 사옥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2000.10. 포스코 민영화
2002. 5. KT 민영화
IMF 외환위기 직후 정부는 경영효율을 극대화하고 공공부문 개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공기업 민영화를 추진했다. 최우선 민영화 기업으로 선정된 포스코는 1980년대부터 줄곧 정부의 민영화 대상이었다. 경영실적이 우수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으며 시장성이 확실해 높은 가격에 매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세계 철강 업계의 민영화 흐름도 포스코의 민영화 추진에 일조했다.
2000년 10월 4일, 3년에 걸친 포스코 민영화 작업이 마무리됐다. 1인당 지분 한도를 3%로 제한해 주주 분산이 극대화되면서 포스코는 지배주주가 존재하지 않는 기업이 됐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고 전문 경영진에 의해 책임 경영이 이뤄지는 선진형 지배구조를 정착시킨 것이다. 포스코는 완전 민영화를 계기로 글로벌 기업으로 재도약하기 위해 2002년 3월 15일 사명을 변경했다. 34년간 사용해 온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라는 이름 대신 설립 초기부터 해외 브랜드로 사용해 온 ‘주식회사 포스코(POSCO)’가 새로운 사명이 되었다. 사명에서 ‘제철’이란 단어를 삭제해 사업영역 확대와 사업다각화 가능성도 열어 뒀다.
유선통신사업을 이끌어온 국내 최대 공기업 KT(전 한국전기통신공사)의 민영화도 같은 시기 추진됐다. 2002년 5월 21일 정보통신부가 정부 소유 지분을 완전 매각하면서 KT는 민영화가 마무리되었다. 매각 금액은 4조7800억 원으로 국내 증시 사상 최대 규모였다.
정부는 삼성, LG, SK텔레콤 등 몇 개 기업이 KT의 지분을 고르게 나누어 가져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선진 경영구조’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뒤늦게 SK텔레콤이 KT 전체 지분의 11.34%를 확보해 최대 주주로 등장했음을 알아차리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최대주주 SK텔레콤이 KT 경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적정 가격’에 ‘완전 매각’을 달성하겠다는 매각 목표를 이루는 데 집착해 일을 조급하게 처리한 정부에 비난이 쏟아졌다.
결국 SK텔레콤은 KT와 지분을 맞교환(스와프)하는 데 합의했다. 2003년 1월, KT와 SK텔레콤이 상호지분 매매대금을 결제하면서 SK텔레콤은 KT로부터 완전히 독립했다. 이로써 정부 자회사와 민간 기업이 혼재하던 국내 통신서비스 시장에 완전 민간 경쟁 시대가 열렸다.

한화생명 63빌딩 전경 (출처: 한화그룹)
2002.12. 한화 대한생명 인수하며 종합금융 그룹으로 변신
대한생명은 1946년 김구의 제자인 강익하 등 33인이 순수 국내 자본으로 이룩한 국내 최초의 생명보험회사다. 1969년 자금난으로 신동아그룹에 매각되었다. 사명을 유지한 채 새 출발 한 대한생명은 1985년 여의도에 당시 동양 최고층 건물이자 본사 사옥인 63빌딩을 준공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1996년에는 총자산 10조원을 넘어서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누적 결손금이 2조2,906억원에 이르며 파산 위기를 맞았다. 예금보험공사는 총 3조5500억 원에 달하는 공적자금을 투입하며 대한생명을 국영 생명보험사로 전환했으나 회생이 불투명해지자 1999년 매각을 추진했다.
당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내부의 우려를 무릅쓰고 대한생명 인수를 적극 추진했다. 산하에 투자신탁과 증권을 보유하고 있던 한화가 대한생명을 인수할 경우 은행을 제외한 금융 분야 전반을 아우를 수 있었다. 금융업을 그룹의 신성장동력으로 삼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3년간 공들인 끝에 한화컨소시엄은 2002년 12월 대한생명 지분 51%를 8,236억 원에 인수했다. 대한생명이 보유 중이던 63빌딩 및 신동아화재 주식(지분율 66.3%)도 함께 인수해 생명보험 및 손해보험업에 동시 진출했다. 이로써 대한생명은 한화금융 계열사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한화는 종합금융기업으로 도약했다.
산업자본의 금융부분 진출에 대한 지적과 헐값 매각 논란이 일자 김승연 한화 회장은 당시 맡고 있던 모든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내려놓고 대한생명 대표이사직에만 전념했다. 무보수로 2년 동안 근무하며 경영 정상화에 힘쓴 결과, 영업력이 크게 개선되며 재무구조가 탄탄해졌다. 인수 1년 만에 사상 최고의 당기순이익을 거두며 생보업계 2위 자리에 올랐으며, 인수 6년 만인 2008년에는 누적 손실을 완전히 해소하며 흑자로 전환됐다. 2010년에는 대한생명을 증권시장에 상장시켰다. 2012년 10월에는 한화생명보험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인수 당시 29조 원에 불과했던 총자산은 2021년말 129조 원으로 급성장했다.

2003년 네이버 광고
2002.10. 네이버 지식iN 서비스 론칭
2000년대 초반 인터넷 검색 포털 분야에서는 다음, 야후, 라이코스, 엠파스가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었다. 1999년 6월 후발주자로 등장한 네이버는 5위권 밖에 있었다. 네이버는 검색시장을 압도하던 야후를 넘어서기 위해 다음의 한메일 같은 자신들만의 킬러 콘텐츠를 연구했다.
2002년 10월 7일 네이버는 참여형 QA(Question Answering) 플랫폼 서비스 ‘지식iN’을 세상에 내놓았다. 2000년 론칭된 한겨레신문사의 디비딕(DBDic) 서비스를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디비딕은 이용자들이 궁금한 것을 묻고 답하는 커뮤니티 서비스로 꽤 인기를 끌었으나 마니아들만의 공간에 머무른데다 수익 창출을 위해 섣불리 유료화를 단행하면서 대중화에 실패한 바 있었다. 네이버는 디비딕의 실패 원인을 철저히 분석해 자체 검색 엔진 내에 ‘지식iN’ 서비스를 론칭하고 질문과 답변내용을 검색 결과로 제공했다.
지식iN 서비스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서비스 론칭 1년 만에 165만 건의 지식인 데이터베이스가 쌓였다. 성공의 핵심은 인간의 ‘성취욕’을 자극하고 이용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내공’과 ‘등급제’였다. 네이버는 질문에 답변한 이용자에게 ‘내공’이라는 포인트를 제공하고 쌓은 내공에 따라 등급을 부여했다. 사람들은 게임을 하듯 지식인 질문에 답변을 달았고, 기발한 질문과 명쾌한 답변에 재미를 느꼈다. 완성도가 높은 질문과 답변을 골라내 데이터 베이스화함으로써 네이버는 풍부한 검색 결과를 제공하고 검색 품질도 향상할 수 있었다.
네이버는 지식iN 서비스에 힘입어 서비스 출시 1년 만에 야후를 제치고 포털사이트 방문자 수 2위, 검색점유율 1위에 올랐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다음(DAUM)’을 누르고 포털 분야 1위를 차지해 현재까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 (출처: LG그룹)
2003. 3. LG 국내 기업 최초 지주사 체제로 전환
LG그룹은 2003년 3월 국내 대기업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지주회사 제도는 1972년 금호실업(현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먼저 도입했으나 당시에는 지주회사의 역할이 제한적이었고 사회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LG의 사례는 이후 많은 국내 기업들이 참고한 모범이자 전형이 되어 실질적인 시발점으로 여겨진다.
지주회사(holding company)란 주식의 소유를 통해 다른 기업의 사업내용을 지배하는 회사로, 크게 ‘순수지주회사’와 ‘사업지주회사’로 나뉜다. 순수지주회사는 자회사를 지배하고 사업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는 업무만을 영위하는 반면, 사업지주회사는 지주회사의 본연의 역할을 하면서 자체 사업도 영위한다. LG그룹은 순수지주회사에 해당한다.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LG그룹은 기업의 체질 개선 및 경쟁력 강화를 위해 단계적 구조조정을 시행하고 2001년부터 지주회사 전환 작업에 착수했다. 화학 부문 지주회사인 LGCI와 전자 부문 지주회사인 LGEI를 세운 후 두 회사를 합병해 2003년 3월 1일 통합지주회사인 ㈜LG를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인적분할(spin-off) 방식과 주식교환에 의한 공개매수 방식을 결합했다. 인적분할은 분할된 회사 간 주주 및 지분구조 변동이 없어 신속한 분할을 가능케 했다. 주식교환에 의한 공개매수는 LG그룹이 국내 최초로 실시한 방식으로, 추가 자금 투입 없이 공개적·합법적인 방법으로 자회사의 보유 지분을 높이고 경영권을 강화할 수 있게끔 했다.
LG는 지주회사와 자회사 간 수직적 출자구조로 지배구조를 단순화했다. 이로써 자회사는 사업에 전념하고 지주회사는 사업 포트폴리오 등을 관리하는 선진적 지배구조 시스템이 구축됐다. 또한 출자와 경영을 철저히 분리해 자율과 책임의 경영 문화를 정착시켰다. 이후 지주회사 분할을 통해 GS, LS, LIG 등과 기업 분리 및 독립도 이뤄냈다. 지주회사 체제는 이후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도 LG가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성항공이 보유하던 ATR-72기종
2004. 8. 저비용 항공사 한성항공(현 티웨이항공) 설립
2004년 8월 국내 최초의 저비용 항공사(LCC: Low cost carrier)인 한성항공이 설립됐다. 한성항공은 청주공항을 거점으로 ‘이유 있는 선택’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양분해온 항공업 시장에 도전했다. 한성항공의 최대 무기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에 비해 절반 수준인 저렴한 운임이었다. 한편으로는 기내식, 좌석선택, 수하물 등을 유상으로 서비스해 수익성을 끌어올렸다. 항공기는 ATR 사로부터 운용비용이 적게 드는 중형 프로펠러 여객기 ATR-72(66인승)를 도입했다. 2005년 9월 1일 제주∼청주 노선을 오가는 첫 비행기를 띄웠다.
당시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증가, 2004년부터 주5일 근무제 시행으로 국내외 여행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저가항공사는 탑승률이 50%만 넘어도 수익 창출이 가능한데, 한성항공은 단 한 대의 비행기만으로 취항을 시작해, 한 달간 평균 84%의 탑승률을 기록했다. 대한·아시아나 양대 항공사의 탑승률(50%)을 크게 웃도는 수치였다. 이후 한성항공은 항공기를 두 대로 늘려 하루 22편씩 운항했다. 한성항공이 성공을 거두자 제주항공(2005), 이스타항공(2007)이 잇따라 출범했다. 대한항공은 진에어(2008), 아시아나항공은 에어부산(2007)과 에어서울(2015)를 설립하며 LCC 시장에 진출했다.
한성항공은 2010년 출판업체 예림당에 인수되었으며 사명을 ‘티웨이항공’으로 바꾸었다. 2021년 8월 기준 우리나라 국적 항공여객사는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등 2개의 FSC(Full Service Carrier:대형항공사)와 8개의 LCC(에어부산·이스타항공·제주항공·진에어·티웨이항공·에어서울·플라이강원·에어로케이)가 있다.

2005년 3월 31일 GS그룹 출범식에서 허창수 명예회장이 사기를 흔드는 모습 (출처: GS그룹)
2005. 3. GS그룹 LG와 아름다운 이별 후 독자 그룹 출범
2005년 3월 27일, LG그룹에서 분리된 GS그룹이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계열 분리 승인을 받음으로써 독자 그룹으로 거듭났다. 이에 따라 창업 이후 57년에 걸쳐 지속된 구씨와 허씨 일가의 동업 관계도 마무리되었다.
LG그룹의 역사는 사돈관계인 故구인회·허만정 창업 회장이 1947년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을 공동창업하며 시작되었다. 구씨 집안에서는 구인회 회장의 동생들이, 허씨 집안에서는 허만정의 3남 허준구가 영업 담당 이사로 기용된 것을 시작으로 그의 동생들이 경영에 합류했다. 동업은 1세대 구인회-허만정, 2세대 구자경-허준구, 3세대 구본무-허창수로 이어졌다.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지닌 두 집안은 ‘인화(人和)’ 정신을 바탕으로 대를 이어가며 별다른 잡음 없이 성공적으로 기업을 이끌었다.
3세대에 이르러 구본무 LG 회장은 사업 영역을 전면 재편해 나갔다. 핵심은 계열사 분리였다. 2004년 4월 이사회를 열어 동업 관계 청산을 공식 선포한 이후 1년 동안 계열 분리와 지분 정리 작업이 진행됐다. 구씨 일가가 맡은 LG는 전자, 화학, 통신 부문 37개 계열사로 재편됐고, 허씨 일가는 지주회사인 GS홀딩스를 포함해 정유, 유통, 홈쇼핑, 건설 등 14개를 맡아 GS그룹을 설립하며 분가했다. 3세대에 이르러 100명 넘는 두 집안의 후손들이 각 계열사 지분을 보유해 정리가 쉽지 않았지만 상호 신뢰와 합의 하에 잡음 없이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두 그룹의 분리는 재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이별’이자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2005년 3월 31일 GS그룹은 새로운 CI와 경영이념 선포식을 통해 독자 그룹 출범을 알렸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기념사를 통해 새 출발의 의지를 다졌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출범식에 참여해 축사하며 두 일가의 변함없는 우애를 보여주었다. 이후 두 그룹은 각자 독자적 사업영역을 일구며 성공적으로 사업을 번창시켰다.

보르도 LCD TV (출처: 삼성전자)
2006. 삼성전자 보르도TV 출시해 소니 꺾고 세계 1위
2006년, 전 세계 TV 시장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30여년간 글로벌 1위 자리를 지켜오던 일본의 소니를 꺾고 후발주자인 삼성전자가 세계시장 1위로 등극한 것이다. 시장의 판도를 바꾼 것은 2006년 출시한 ‘보르도TV’였다.
출시 1년 전인 2005년, 삼성전자는 ‘가전의 얼굴’인 TV 시장에서 소니를 제칠 세계 일류 제품을 내놓기 위해 TF팀을 꾸렸다. 소니는 브라운관 TV의 절대강자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브라운관 TV가 세계 TV 시장점유율 82.9%를 기록하며 LCD·PDP·프로젝션 등 디지털TV를 압도했다. 삼성은 당시 세계 시장점유율이 11.3%에 불과한 LCD TV에 승부수를 던졌다. 산업 전 분야의 흐름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고 있었다. 또한 삼성은 이미 반도체, LCD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는 등 디지털 기술에 강점이 있었다.
당시 고객들은 단순히 기술적으로 뛰어난 TV보다 고급 가구 느낌의 세련된 디자인을 가진 제품을 원했다. 세계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소비자들은 실내 인테리어에 관심을 높여가고 있었다. TF팀은 ‘가구 같은 TV’라는 콘셉트를 잡고 한눈에 삼성 TV임을 인지할 수 있는 독창적 디자인, 얇고 세련된 디자인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2006년, 삼성은 사각형에 무채색 일색이던 TV 시장에 레드와인이 담긴 와인잔을 형상화한 ‘보르도TV’를 내놓았다. 하단이 둥근 스탠드 디자인, 부드러운 곡선형 모서리, 블루와 와인 색상을 제품 하단에 적용해 세련된 느낌을 강조했다. 두께를 8cm대로 줄여 공간활용도를 높이고 스피커는 보이지 않도록 밑에, 콘트롤 버튼은 옆면에 배치해 화면 이외의 다른 요소를 배제했다.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보르도TV는 출시 6개월 만에 판매량 100만대를 기록했다.
보르도TV 출시 이후 삼성전자는 TV 사업 진출 34년 만에 세계 시장 1위에 올랐으며 이후 디자인을 강조한 신제품을 계속해서 선보여 2006년부터 글로벌 시장 1위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브라운관 TV의 화질과 성능을 높이는 데 집중한 소니는 시장 주도권을 삼성과 LG 등 한국업체에 힘없이 빼앗기고 말았다.

2007.5 포스코 세계 최초로 파이넥스(FINEX) 설비 준공
2007. 5. 포스코 세계 최초로 파이넥스(FINEX) 설비 준공
포스코는 1999년 파일럿 플랜트 가동에 이어 2007년 세계 최초로 연산 150만톤 규모의 파이넥스(FINEX) 상용화 설비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파이넥스 공정은 가루 형태의 철광석과 석탄을 가공 없이 직접 투입하여 쇳물을 생산하는 설비이다. ‘파이넥스’라는 이름도 가루를 의미하는 파인(Fine)에서 비롯됐다. 포스코와 지멘스VAI가 공동개발한 혁신 기술로, 1990년 정부 공업기반기술과제로 개발을 시작했다. 상업화 가능성을 확인한 포스코는 2000년부터 단독으로 상용화 개발에 착수, 6년 만에 상용화에 성공했다.
파이넥스 공법은 지난 100여 년간 사용돼 온 용광로 공법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로 관심을 끌고 있다. 용광로 공법은 철광석과 유연탄을 용광로에 넣기 전에 미리 덩어리 형태로 가공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환경 오염 물질이 많이 발생하고 제조 비용도 높다. 또한 덩어리 형태로 잘 뭉쳐지는 고점결성 유연탄은 세계 석탄 매장량의 15%에 불과해 원료 고갈 위협에 직면한 상태다. 이 때문에 세계 메이저 철강업체들은 8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제철 기술 상용화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수많은 업체가 다양한 공법을 고안해냈지만, 상용화에는 모두 실패했다. 이런 가운데 포스코가 한발 앞서 파이넥스 공법으로 가장 먼저 대규모 상용화에 성공한 것이다.
파이넥스 공법은 철광석과 원료탄의 사전처리 공정이 필요치 않아 제조공정이 단순하며, 고로 대비 설비 투자비는 20%, 제조 원가는 15%나 절감할 수 있다. 또한 원료처리 과정에서 공해물질이 거의 발생하지 않아 친환경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포스코는 파이넥스 공법 상용화를 통해 철강 제조기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림으로써 세계 철강업계를 선도하는 경쟁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밥캣 로더 (출처: 두산그룹)
2014년 두산밥캣이 100만번째 로더 생산을 기념하기 위해 미국 공장에 설치한 실물크기 로더 모형

세계 최초의 쿠션 파운데이션 제품 에어쿠션® (출처: 아모레퍼시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