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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제(효성)

대한민국 경제를 성장·발전시켜온
한국 대표 기업인의 삶과 경영철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물

조홍제

1906년 5월 20일 - 1984년 1월 16일
조홍제

효성그룹의 창업주입니다. 해방 이후 이병철과 공동 출자하여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였습니다. 이후 56세의 나이에 효성물산을 설립하며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늦되고 어리석다’는 뜻의 ‘만우(晩愚)’라는 호를 스스로 붙였으나, 경제인으로서 누구보다 부지런히 국내 산업계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조선제분, 한국타이어, 대전피혁과 같은 부실기업을 흑자기업으로 만들고 동양나이론 설립을 시작으로 섬유, 산업자재, 화학, 중공업, 정보통신 등 한국의 기간산업을 거느린 효성그룹을 키운 불굴의 기업가입니다.

생애

1906 ~1926

  • 1906.5
    •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 출생
  • 1921.2
    • 하정옥 여사와 혼인
  • 1922.3
    • 중동학교 초등과 입학
  • 1924.4
    • 중앙고등보통학교 입학
  • 1926.6
    • 6·10 만세운동으로 옥고

1927 ~1946

  • 1927
    • 중앙고보 재학 중 6.10만세운동 주동자로 옥고
    • 일본 와세다공업전문학교 입학
  • 1928
    • 일본대학 야간 전문부 정경과 입학
    • 일본 가마쿠라중학교 4학년 편입
  • 1929.4
    • 일본 법정대학 경제학부 독일경제학과 입학
  • 1935
    • 일본 법정대학 경제학부 독일경제학과 졸업
  • 1936
    • 군북금융조합 조합장 피선
  • 1942
    • 군북산업조합 인수

1947 ~1956

  • 1948.11
    • 삼성물산공사에 투자, 이병철과 동업
  • 1953.8
    • 제일제당 설립 참여
  • 1954.9
    • 제일모직공업 설립 참여

1957 ~1966

  • 1960.11
    • 제일제당 사장 취임
  • 1962.9
    • 효성물산주식회사로 독자적 사업 개시
  • 1962.9
    • 조선제분 운영
  • 1962.12
    • 한국타이어 경영 참여
  • 1963
    • 대전피혁공업 인수
  • 1964
    •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 1964.9
    • 동양카프로락탐주식회사 합작설립
  • 1965
    • 수출산업공단 이사로 피선
  • 1966.11
    • 동양나이론 설립

1967 ~1976

  • 1967
    • 울산 타이어코드 공장 완공
  • 1968.4
    • 동양나이론 울산공장 시운전 성공
  • 1970.2
    • 대동건설 설립
  • 1970.8
    • 한일나이론 인수, 동양나이론에 합병
  • 1971.1
    • 동양나이론 기술연구소(현 효성기술원) 설립
  • 1973.5
    • 동양폴리에스터 설립
  • 1974
    • 효성증권 설립
  • 1975.10
    • 한영공업(현, 효성중공업주식회사) 인수
  • 1975.11
    • 제12회 수출의 날 동탑산업훈장 수훈
  • 1976.3
    • 동양학원 이사장 취임
  • 1976.11
    • 제13회 수출의 날 금탑산업훈장 수훈

1977 ~1984

  • 1977.9
    • 창원 중전기공장 준공
  • 1977.10
    • 대동건설, 효성건설로 상호변경
  • 1978.6
    • 효성기계공업 설립
  • 1979
    • 율산알루미늄, 율산중공업 인수
  • 1979.11
    • 일본 미쓰비시와 합작사 효삼콘트롤 설립
  • 1980.5
    • 동양나이론, 구미에 국내 최초 컴퓨터 공장 준공
  • 1980
    • 코오롱종합전기·쌍용전기 인수, 효성중공업에 편입
    • 서독 바스프사와 합작, 효성바스프주식회사 설립
  • 1981
    • 경영에서 물러남
  • 1984.1
    • 별세

주요사건과 업적

  • 30세 늦깎이 대학 졸업생

    조홍제는 1906년 5월 20일 경남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서 한학에 조예가 깊은 선비이자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부의 반대로 신학문을 배우지 못하다 겨우 허락을 얻어 서울에 올라와 19세의 나이로 중앙고보(현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과 리더십으로 반장을 하며 급우들의 신망을 얻었던 조홍제는 1926년 6〮10 만세 운동 때 주동죄로 수 주간 옥살이를 경험하고, 다음해에는 동맹휴학의 주동자로 몰려 퇴학을 당한다. 대학입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조홍제는 가마쿠라 중학교에 편입한 후, 이듬해 호세이 대학 독일경제학과에 입학한다. 남들보다 늦은 만큼 열심히 학문에 전념하였고 1935년 30세가 되던 해 대학을 졸업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 이병철과의 만남, 동업의 시작

    조홍제는 유학 당시 일본 곳곳에 있는 회사들을 견학하며 사업의 꿈을 키웠다. 귀국 후 사업준비를 하려 했으나 집안 살림을 살펴 달라는 부친의 간청으로 고향에 내려와 군북금융조합장으로 추대된다. 조홍제는 소작인들을 자작농으로 육성하는데 노력해 농민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아 9년 동안 조합장을 역임하면서 경영에 대한 노하우를 습득한다. 조홍제는 1945년 광복을 맞자 사업을 하겠다는 포부를 살려 서울로 상경한다. 이 때 집 근처로 고향 친구 동생으로 알고 지낸 이병철(삼성 초대회장)이 이사를 왔고 이들은 사업을 함께 구상한다. 1948년 11월 두 사람은 서울 종로 2가의 한 사무실을 임차해 무역회사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동업을 시작한다.

  • 걸어다니는 최신 무역백과사전

    삼성물산공사 부사장을 맡은 조홍제는 사업초반 주로 홍콩을 상대로 무역업을 했다. 당시 달러가 부족하자 달러 대신 오징어 3만근을 가지고 홍콩으로 건너가서 오징어를 담보로 면사 100근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른바 우리나라 최초의 D/P거래(수출입 외상거래)를 성사시킨 것이다. 조홍제의 활약은 계속된다. 수출 아이템을 찾기 위해 전국을 돌다 우연히 목포의 면실유 공장에 다량의 ‘면실박'(목화씨에서 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 비료 대용으로 쓰임) 1만3천여 톤이 방치된 것을 보고, 이를 수출할 방안을 모색하다 관심있는 영국 바이어를 찾아내 약3만 달러의 수익을 낸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으로 삼성물산이 이전했을 때는 고철을 일본에 수출하고 홍콩으로 설탕, 비료 등을 수입하여 판매하는 수완을 발휘해 1953년 2월, 삼성물산은 약 48억원의 이익을 낸다. 조홍제는 100종류 이상의 수출입 품목의 시세, 산지, 선편 등을 꿰뚫어 걸어다니는 ‘최신 무역백과 사전’으로 통했다.

  • 제조업의 첫 발, 설탕 생산

    조홍제와 이병철은 무역업 성공 이후, 제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했다. 수요와 장래성, 생산설비와 기술의 실현 가능성 등을 염두에 두어 면밀한 조사를 이루던 차에 그간 삼성물산이 가장 많이 수입한 품목이 설탕이라는 점을 고려해 ‘제일제당’의 초석을 닦는 작업을 시작한다. 공장 설립을 위해 많은 자금이 필요했고 그만큼 위험도 따랐지만, 그는 이 중대한 목표의 성취가 이후의 사업확장에 있어 매우 큰 자양분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그리고 마침내 1953년 해방 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설탕이 생산되었다. 공장을 가동한지 2년 만에 생산 규모는 하루 100t에 이르렀고, 1955년에는 한국에서 팔리는 설탕의 절반을 제일제당이 공급했다. 이로써 설탕수입에 쓰이던 외화를 크게 절약하는 수입대체 효과를 냈다.

  • 협상의 기술을 발휘, 제일모직 설비도입

    제조업 확장을 모색하던 조홍제와 이병철은 당시 정식수입이 어려워 밀수품이 넘쳐나던 고급양복지를 주목하고, 1954년 9월 제일모직을 설립한다. 조홍제는 선진국들의 모직산업을 면밀히 알아보기 위해 미국, 영국, 독일 등으로 출장을 떠난다. 여러 업체를 만나고 조건을 따져 본 결과 독일의 ‘스핀바우'사의 설비가 가장 뛰어나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시작한다. 조홍제는 스핀바우사에게 제일모직이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업체들로부터 여러 구매제의를 받고 있다는 정보를 흘리면서, 향후 몇배로 시설을 추가 증설할 것이라며 계약을 유도하는 협상기술을 발휘한다. 결국 스핀바우사가 손해를 볼 정도로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따내고 1956년 6월 ‘골덴텍스’라는 제품명의 양복지를 시판하여 우수한 품질을 바탕으로 시장에서 인정받아 설립 4년만인 1958년 흑자를 기록한다.

  • 동방의 샛별이 떠오르다

    1962년 조홍제와 이병철은 1948년 삼성물산을 시작으로 약 14년 동안 이어온 동업관계를 정리한다. 당시 조홍제의 나이는 56세로 사업을 정리하고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으나, 기업가정신만은 여전히 청년이었다. 조홍제는 본인의 사업경험을 살려 무역회사 ‘효성물산’을 설립해 독자적인 경영을 시작한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민족의 앞날을 밝게 비출 ‘동방의 별’이라는 뜻의 ‘효성’을 평생의 지향점으로 삼아왔던 그의 신념을 사명에 담았다. 이어서 사업다각화를 시도하며 제분업에 진출했다. 삼성 시절 제일제당 설립과 경영을 하였기에 자신이 있었다. 조홍제는 당시 경영난에 직면한 조선제분을 임차경영하여 1962년말 공장가동을 시작한지 1년도 안돼 대출금을 상환하고 하루 밀가루 1만 부대를 생산하는 종업원 400명 규모의 업계 2위 자리에 올려놓는다.

  • 한국타이어, 흑자의 바퀴를 굴리다

    조홍제는 1962년 12월 한국타이어 경영에 나선다. 한국타이어는 일본 브리지스톤타이어의 한국자회사로 조선다이야공업이라는 이름으로 1941년 설립됐다가 광복과 함께 정부재산으로 귀속됐다. 1958년 12월 삼성물산이 49.5%를 인수했다가 동업청산 시 효성이 관리하게 되었는데, 당시 한국타이어는 9억원의 부채를 안고 한일은행 관리 하에 있던 부실기업이었다. 타이어 수요가 많지 않다는 비판과 우려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조홍제는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이후의 산업전망을 내다보며 타이어의 고도성장을 확신했다. 1964년을 ‘품질 개선의 해’로 정하고 품질향상에 노력을 기울여 1965년에는 KS마크를 획득하는 등 품질과 기술력에 내실을 다졌다. 조홍제의 예측은 곧바로 적중했다. 1966년부터 국산승용차가 출시되고, 1969년 경인고속도로 개통을 시작으로 물동량 늘어났고, 중동을 중심으로 수출시장도 확대되는 등 타이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조홍제는 경영에 참여한지 5년 만인 1967년 부채를 모두 상환하고 경영정상화를 넘어 글로벌 타이어기업을 이끌게 된다.

  • 일생의 주력사업, 동양나이론

    조홍제는 조선제분, 한국타이어 등 부실기업을 일으키며 사업을 성공시켰으나 앞으로 효성의 주력사업으로 기간산업이면서 수입대체 효과가 큰 사업을 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30대 과장급 인재 10명으로 구성된 기획팀을 구성해 2년간의 조사 끝에 20가지가 넘는 유망사업을 발굴한다. 조홍제는 이중 ‘나일론’ 사업을 선택했다. 의류 뿐만 아니라 산업용으로 쓰임새가 많았으며 상당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홍제는 나일론 공장건설을 위한 해외기술 도입과 차관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1966년 11월 ‘동양나이론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동시에 조홍제는 후발업체로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타이어코드지(T/C지)의 국내 최초 생산공장 준비를 병행하여 1967년 11월 나일론 원사의 타이어코드지 개발에 성공한다. 1968년 4월 동양나이론은 시운전을 시작했고 나일론 원사가 새하얗게 쏟아져 나왔다. 동양나이론의 나일론 원사의 상표는 ‘토프론’으로 정상을 의미하는 ‘탑(TOP)’과 나일론의 ‘론(LON)’을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이후 조홍제는 1970년 한일나일론 인수, 1973년 동양폴리에스터 설립, 한영공업을 인수해 효성중공업을 설립하는 등 제2의 창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나갔다.

  • 기술과 인재육성으로 부강한 국가를 꿈꾸다

    조홍제는 성공하는 사업의 핵심은 ‘기술’이라는 것을 알았다. 품질이 나쁜 물건을 만드는 것은 도둑질과 다를 것이 없다며 1971년 국내 최초의 민간연구소인 ‘동양나이론 기술연구소(현 효성기술원)’를 설립했다. 민간 R&D 투자에 대한 개념이 생소했던 시절 동양나이론의 기술 연구소의 활약은 본보기가 되어 1970년대 말부터는 다른 기업들도 따라서 연구소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조홍제는 인재육성에도 힘썼다. 1953년 영남장학회를 만들어 매년 40여 명의 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원했고 1959년에 배명학원 이사장을 맡아 건축비와 장학금을 지원했다. 1976년에는 남은 여생을 교육사업에 힘써보겠다며 재정난에 처한 동양학원(동양공전,동양공고,동양중학)을 인수해 이사장을 맡으며 25억원을 조건없이 출연한다. “우수한 기술자가 많이 배출돼야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말한 그의 신념의 결과였다.

경영철학

조홍제

적재천만 불여박기재신(積財千萬 不如薄技在身)

“몸에 지닌 작은 기술이 천만금의 재산보다 더 귀하다” (조홍제 회장이 내세운 동양학원 교시)
“기술연구소에 투자하는 것은 기업 흥망의 ‘보험’이라고 생각한다. 보험이란 아프지 않고 사고가 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보험을 안 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는 다 쓸 일이 있다. 기업이 연구개발 하지 않으면 언제가는 망하기 마련이다” 1971년 동양나이론 기술연구소 설립 당시 발언

조홍제는 1950년대부터 선진국 공장들을 시찰하며 기술의 중요성을 깨닫고 해외에 의존하지 않는 기술독립을 지향했다. 기업경쟁력의 본질은 기술에서 나온다는 조홍제의 신념은 경영의 근간이 되었고, 1971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기술연구소를 짓는 등 국내 R&D 투자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조홍제의 기술 제일주의 정신은 오늘날 스판덱스, 타이어코드, 시트벨트용 원사, 에어백용 원단 등의 핵심 소재 산업 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는 ‘기술의 효성’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