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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병(두산)

대한민국 경제를 성장·발전시켜온
한국 대표 기업인의 삶과 경영철학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인물

박두병

1910년 10월 6일 - 1973년 8월 4일
박두병

두산그룹의 초대회장입니다. 해방 이후 동양(OB)맥주, 두산산업, 동산토건, 윤한공업사 등을 설립하며 두산그룹의 터전을 닦았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우리 기업의 대내외적인 위상을 드높이는 일에 힘썼던 인물입니다.
"누군가 내게 다시 생을 살게 된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물어면 나로서는 그에게 현명한 답변을 줄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학자가, 관리가, 군인이 될 수 없을 것이라는 나의 뿌리 깊숙이 박힌 관념은 현명한 답변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상인일 것이라는 답변밖에 할 수 가 없다."
- 방송 대담 프로그램에서 밝힌 소신, 1969

생애

1910 ~1950

  • 1910.10
    • 서울 출생
  • 1929
    • 경성고등상업학교(서울대 상대 전신) 입학
  • 1932
    •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입사
  • 1936
    • 박승직상점 주식회사 상무 취임
  • 1945.10
    • 소화기린맥주 주식회사 관리지배인 취임
  • 1948.3
    • 동양맥주 주식회사로 상호 변경
  • 1948.7
    • 동양맥주 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1951 ~1960

  • 1951
    • 주식회사 두산상회 발족
  • 1952.5
    • 동양맥주 정부로부터 불하 받아 인수 OB(Oriental Brewery) 상표 사용
  • 1953.6
    • 두산상회를 두산산업으로 상호 변경
  • 1953.8
    • 동양맥주 맥주 생산 및 시판
  • 1960.7
    • 동산토건(현 두산건설) 주식회사 설립

1961 ~1973

  • 1963
    • 70일간 세계일주
  • 1964
    • 금강융단주식회사 인수
  • 1966
    • 한양식품 주식회사 설립
    • 합동통신사(연합뉴스 전신) 인수
  • 1967.5
    • 윤한공업사 설립
  • 1967.8
    •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취임
  • 1969.1
    • 광고기획사 만보사(현 오리콤) 창립
  • 1969.4
    • 한국병유리 주식회사 설립
  • 1970.5
    •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회장 취임
  • 1970.5
    • 한국-멕시코 경제협력위원회 창립
  • 1971.10
    • 로널드레이건 전 미국대통령(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방한
  • 1972.5
    • 아시아상공회의소연합회 최초 종신 명예회장으로 추대
  • 1973.5
    • 동양맥주 주식회사 기업공개
  • 1973.6
    • 한양투자금융 주식회사 설립(코오롱그룹 합작)
  • 1973.8
    • 별세

주요사건과 업적

  • 1936년. 박승직상점의
    새바람이 되다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입사해 순탄한 직장인 생활을 하던 박두병은 부친인 박승직의 권유로 그가 운영하는 포목상점에서 사업가의 인생을 시작한다. 박두병은 30여명 규모의 상점에 새로운 경영제도들을 도입했다. 국내최초로 ‘출근부’를 만들고 ‘상여금 제도’를 실시하였으며, 여자 손님들을 더욱 친근히 대하기 위해 1명뿐이던 ‘여종업원’을 5명으로 추가로 고용했다. 또한 사내 야구부와 탁구부를 만들고 전 직원 야유회를 열었다. 박두병의 새로운 경영방식은 직원들의 동기부여와 사기를 북돋고 고객 만족도를 높여 상점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 1945년. 맥주처럼 짜릿한
    경영의 맛

    해방 후, 박두병은 새롭게 열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의 자본으로 세워진 ‘소화기린맥주’의 자치위원회가 그에게 새로운 지배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일본이 남기고 간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바른 일인지 고민했으나, 그 기업을 지탱하고 있던 조선 사람들의 생계를 고려하여 1945년 10월, 어렵사리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이 되기로 했다. 이후, 한 달 만에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첫 맥주가 생산되었고 특유의 리더십과 경영능력으로 회사를 튼튼하게 만들어 나갔다. 박두병은 일본의 잔재로 남아있던 ‘소화기린맥주’의 상호를 ‘오리엔탈 브루어리(Oriental Brewery, 동양맥주)’의 약자인 ‘OB맥주’ 바꾸고, 1948년 기업가 공모를 통해 동양맥주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 1946년. 4500달러와 두산의 시작

    1945년, 소화기린맥주의 관리지배인이었던 박두병은 월급만으로는 집안의 큰살림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에 태평양전쟁으로 문을 닫았던 박승직상점의 명맥을 이어 작은 무역업을 시작한다. 부친 박승직은 아들 두병의 이름 첫자인 '두(斗)'에 '산(山)'을 붙여 '두산(斗山)'이라는 상호를 지어줬다. 한 말 한말 차근히 쉬지 않고 쌓아올려 산같이 커지라는 뜻이었다. 1946년, 두산상회는 홍콩으로 게살 통조림을 수출하였는데 이 때 약 4,500달러라는 큰 돈을 벌어들인다. 이는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 혼란했던 시기, 박두병에게 매우 큰 힘이 되어주었고 그는 이 돈을 자본 삼아 ECA(미국의 대외원조기구)의 계획하에 구호 물품이나 원조 자재 등을 수송하는 대규모 운수업체 ‘제3모터풀’을 운영하게 된다.

  • 1953년. 다시 부활한 OB

    두산상회의 이름으로 ECA(미국의 대외원조기구)의 일을 순조롭게 진행한 박두병은 전쟁으로 기울어진 동양맥주(OB맥주)를 재건할 계획을 세운다. 마침 정부의 불하계획을 전해들은 박두병은 1952년 5월 공개입찰을 통해 동양맥주를 인수한다. 그는 직원들과 함께 불에 타 없어진 작업장과 타다 남은 기계, 모두 상해버린 효모를 뒤로하고 밤낮 없는 복구작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세워진 동양맥주는 1953년 8월 제품생산을 시작했다. 같은 해 두산상회는 ‘두산산업’으로 사명을 바꾸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기’ 위한 새로운 상품 도안을 개발하고 외국산 맥주 사이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매진한다.

  • 1960년. 사업다각화의 시작, '동산토건’ 건설회사 설립

    박두병은 동양맥주를 중심으로 한 사업다각화를 위한 첫 아이템을 ‘건설’로 정하고 동양맥주 영선과를 독립시켜 1960년 7월 동양맥주의 ‘동’과 두산산업이 ‘산’을 따 ‘동산토건(현 두산건설)’이란 건설회사를 설립한다. 동산토건은 1962년 맥아생산공장을 준공한 일을 시작으로 동양맥주의 공장건물 보수 및 사택 건설 등 크고 작은 공사를 순조로이 해내며 1964년부터는 외부 공사도 수주하며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 1967년. 중공업 진출을 향한 발걸음

    박두병은 늘 다음 단계로의 진화를 꿈꿨다. 그는 한국 기계공업 분야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1967년, 윤한공업사(현 두산메카텍)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동양맥주의 한 사무실을 쓰며 맥주 생산을 지원하는 기계 제작을 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정부의 공업화 정책과 맞물려 중대형 자동차 정비사업, 도시 중심가 및 고속도로 대형 입간판 등을 제작하는 일로 사업 분야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후 삼학소주 목포 공장 자동생산 설비, 동남식품 포장기계 설치 등 여러가지 프로젝트들을 성공적으로 이행했다. 윤한공업사, 동산토건은 2000년대 대우종합기계, 한국중공업 등을 인수하며 그룹의 체제를 중공업으로 전환시켜 오늘날 두산그룹의 근간이 되었다.

  • 1967년. 대한상공회의소의 회장이 되다

    박두병은 1967년, 전국 지방상공회의소의 운영과 사업을 종합하고 국내외 경제단체와 협력해 나라의 상공업 발전을 돕고자 설립한 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된다. 1967년부터 1973년까지 6년간 제6~8대 대한상공회의소의 회장을 역임하며 우리나라 산업의 합리화와 기업의 국제화를 이끌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 1969년. 더욱 건설적인 미래를 위하여

    1969년 12월 박두병은 ‘기업인은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평소의 뜻을 이루기 위해 동양맥주의 상무로 일했던 과거의 동료 정수창을 두산의 경영을 총괄하는 사장직으로 소환하고, 본인은 경영 일선에 물러났다. 박두병은 동생이나 아들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당연하게만 생각하지는 않았고, 자본과 경영의 분리라는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자 하였다. 이로써 한국 재계에서도 전문경영인의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

  • 칸맞춤을 위한 빈 li

경영철학

박두병

한 말 한 말 쌓아 태산같이

“부끄러운 성공보다 좋은 실패를 택하겠다면 그 생각이 옳습니다.
좋은 시도가 담긴 실패는 한 번의 기회를 잠깐 놓치는 것뿐이지만
부끄러운 성공은 수많은 기회를 모두 잃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박두병은 기업인으로 첫 발을 내디디며, 근대 기업 초기에 보기 드물었던 성과급제, 사내동아리 등 혁신적인 경영방식을 선도적으로 도입해 기업에 활력을 불어넣던 열정의 인물이다. 경영의 말년에는 당시 우리나라 기업 경영 풍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경영과 자본을 분리하는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하여, 경영인들을 각성하게 했던 선각자였다. 그는 ‘기업의 존재 목적은 사회적 책임에 있다’는 믿음 하에, 함께 일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긴 또 하나의 동료이자, 눈 앞의 성공을 위해 그 어떤 부끄러운 선택도 하지 않았던 신념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