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MENU

3.1969년 한진 대한항공공사 인수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 한국경제의 결정적 순간 등
기업활동과 관련된 컨텐츠들을 실었습니다.

“만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키우고 발전시켜 나가는 게 기업의 진정한 보람이 아니겠는가.”

사건사진

▲ 1969년 3월 김포국제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공사 인수식 (출처 : 대한항공)

1967년 어느 날, 한진 창업주 조중훈은 청와대로부터 호출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 “대통령 재임 기간에 전용기는 그만두고라도 우리나라 국적기를 타고 해외여행 한 번 해보는 게 내 소원이네.”

조중훈은 난감했다. 이미 김성곤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차례로 찾아와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달라는 대통령의 뜻을 전했을 때 거절한 바 있었다.

인수를 거절한 것은 한진 뿐만이 아니었다. 두 차례에 걸친 항공공사 공개입찰에 어느 기업도 응찰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항공공사는 당시 20여개 국영기업 중 가장 큰 적자를 내며 도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누적 적자 27억 원, 아시아 11개국 항공사 중 꼴찌인 11위였고, 보유 항공기 8대를 다 합쳐봐야 400석도 되지 않았다. 8대 중 제트기 한 대만 그럭저럭 쓸 만했고 나머지는 기체 고장이 잦아 툭하면 결항한 탓에 공신력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

정부는 민영화를 통해 경쟁력을 높이고자 했으나 부실투성이 기업을 떠안으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더구나 한진은 베트남전에서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을 맡아 성공을 거둔 뒤 이를 발판으로 해운업 진출 계획을 본격화하려던 때였다.

조중훈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오래전부터 해운에 관심이 많았으니 해운공사라면 맡아보겠습니다.” 대통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해운공사는 이미 맡겠다고 한 사람이 있으니 항공공사를 맡아주게.” 빠져나갈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사건사진

▲ 대한항공공사 사장 임명장을 받고 선서하는 조중훈 사장 (1969.3.6) (출처 : 대한항공)

사건사진

▲ 김포공항에서 열린 대한항공 동남아노선 취항식 모습(1969. 10. 2) (출처 : 대한항공)

정부가 한진에 집요하게 인수를 강권하는 데도 이유는 있었다. 항공업은 조중훈이 운송업에 뛰어들 때부터 관심을 가진 사업이었다. 1960년 이미 ‘세스나’ 비행기로 에어택시 사업을 했고, 한국항공을 설립해 국내선 운항도 경험한 바 있었다. 정부가 항공공사 민영화를 추진하는 시기에도 한진은 서울과 베트남을 오가는 자체 인력 수송을 위해 슈퍼컨스텔레이션 4발기를 운항하고 있었다. 한진의 사업 추진력과 수송 사업을 통해 나라에 보탬이 되겠다는 수송보국의 창업정신도 정부가 조중훈을 대한항공공사 사업의 적임자로 판단한 근거였다.

조중훈이 대답을 망설이자 박정희 대통령은 쐐기를 박았다. “국적기는 하늘을 나는 영토 1번지가 아닌가. 우리 국적기가 날고 있는 곳에 그 나라의 국력이 뻗치는 것 아니겠나? 조 사장이 발군의 전문가이니 맡아 주시오.”

대한항공 출범과 민항시대의 개막

결국 조중훈은 결단을 내렸다. “힘이 미치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지만 정 어려운 사정이 생기면 꼭 세 번만 대통령을 찾아 의논을 드리겠습니다.” 박 대통령은 흔쾌히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훗날 대통령에게 어려움을 호소한 적은 없었다.

임원들은 강경하게 반대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들이붓다간 한진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조중훈도 대한항공공사 인수가 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건사진

▲ B747 항공기 10대 도입 차관계약 체결. 오른쪽 조중훈 대한항공 창업주(1979.10.27) (출처 : 대한항공)

사건사진

▲ 보잉747 점보기의 태평양 노선 취항식.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오른쪽 세 번째)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오른쪽 네 번째)(1973.5.16) (출처 : 대한항공)

“결과만 예측하고 시작하는 사업, 이익만 생각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업은 진정한 의미의 사업이 아니오. 만인에게 유익한 사업이라면 만 가지 어려움과 싸워나가면서 키우고 발전시키는 게 기업의 진정한 보람이 아니겠소? 항공공사 인수는 국익과 공익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소명이오.” 간곡한 설득에 임원들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1969년 3월 1일, 한진은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고 사명을 ‘대한항공’으로 바꾸었다. 총 514명의 대한항공공사 직원을 그대로 인수하고 경영합리화 조치를 통해 내부 틀을 잡아갔다. 과감한 투자로 국제노선을 확충하고 대형 제트기 등 신기종도 도입했다. 대한항공은 민영화 4년째인 1972년 첫 흑자를 기록했으며 점차 세계 유수의 항공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렇게 대한항공의 출범과 함께 한국의 민항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