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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83년 삼성 이병철 반도체 진출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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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활동과 관련된 컨텐츠들을 실었습니다.

운명을 가른 이병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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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도쿄선언 직후 삼성이 언론에 실은 반도체 광고 (출처 : 삼성전자)

1983년 2월 8일 아침, 일본 도쿄의 오쿠라호텔.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회장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삼성의 운명을 좌우할 결단이었다. 그는 홍진기 당시 중앙일보 회장에게 국제전화를 걸었다. “누가 뭐래도 삼성은 반도체 사업을 할 것이니 이 사실을 내외에 공표해 주시오.” 삼성 역사에 변곡점이 된 이른바 ‘2.8 도쿄 선언’이었다.

한 달 뒤 중앙일보 지면에 삼성의 선언문이 실린다.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오늘을 기해 삼성은 VLSI(초고밀도집적회로) 사업에 투자하기로 한다.”

이로써 삼성의 반도체 사업 진출이 전 세계에 공식화됐다. 도쿄 선언 발표 직후 인텔은 삼성을 ‘과대망상증 환자’라고 비웃었고, 일본 미쓰비시는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서 성공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냈다.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사업이 실패해 삼성에 위기가 오면 취약한 국내 경제 전반에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우려였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삼성을 평가절하 했다. 당시 삼성은 가전제품용 고밀도집적회로(LSI)도 겨우 만들던 때였다.

한국반도체 인수로 첫발을 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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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한국반도체 부천공장 전경 (출처 : 삼성전자)

삼성은 이미 반도체사업에 발을 들인 바 있었다. 세계의 여러 반도체 관련 인사들을 만나며 반도체 공부에 깊이 빠져 있던 이건희 당시 중앙일보 이사는 ‘투자 과잉이고 기술력도 부족하다’는 삼성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재를 털어 1974년 12월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다.

한국반도체는 1974년 강기동 박사와 당시 통신장비 전문 수입상이었던 켐코(KEMCO)의 김규한 사장이 설립한 한국 최초의 전(前) 공정 반도체 제조공장이었다. 국내 최초로 반도체 원판인 웨이퍼 가공을 시작했지만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한파에 곧바로 부도 위기를 맞았다.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삼성은 전자시계용 CMOS 칩, 전자 오븐용 칩, 트랜지스터 등을 잇달아 개발해냈다. 그러나 기술력은 선진기술을 습득하는 기초적 수준이었고 적자 상태가 계속됐다. 결국 자본잠식 상태에 다다랐다. 이건희의 지속적인 설득에 호암은 1977년 한국반도체의 나머지 50% 지분을 인수했다. 1978년 상호를 삼성반도체로 바꾸고 1980년 삼성전자로 합병됐다가, 1982년 다시 한국전자통신과 합병해 삼성반도체통신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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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한국반도체 사원모집 공고 (출처 :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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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삼성반도체 부천공장 전경 (출처 : 삼성전자)

이병철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은 실리콘밸리 방문

호암은 삼성반도체의 부진 이유를 경험 부족으로 진단하고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고바야시 고지 일본 NEC 회장에게 부천공장을 둘러보고 문제점을 지적해달라고 부탁한다. 며칠 후 NEC의 과장급 엔지니어 5명이 와서 부천공장을 둘러보고 갔으나 아무 말이 없었다. 호암은 NEC 회장에게 다시금 반도체 기술을 요청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한다. “반도체가 뭐고? 얼마나 중요하기에 NEC 회장이 내 요구를 거절하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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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4월 2일 보스턴대학의 명예경영학박사 학위를 수여받는 이병철 회장 (출처 : 호암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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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2년 4월 2일 보스턴대학 명예경영학박사 학위 수여 답례 만찬회에서 연설하는 이병철 회장 (출처 : 호암자전)

자존심이 상한 호암은 이때부터 세계 반도체 전문가들을 만나며 반도체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호암은 특히 일본에서 만난 경제전문가 이나바 히데조 박사의 말에 감명받는다. “앞으로 산업은 반도체가 좌우한다. 경박단소한 것을 만들어야 한다.”

1982년 3월, 호암은 보스턴 대학에서 경영학 명예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미국 방문길에 오른다. 이때 호암은 실리콘밸리에서 IBM, 제너럴일렉트릭, 휴렛팩커드 등의 반도체 공장을 둘러본다. 여기서 호암은 반도체가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핵심산업으로 부상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결정적 한 수, D램 진출을 결심하다

호암은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반도체 관련 신규 사업 기획안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또한 세계의 수많은 반도체 전문가를 만나 의견을 듣고 반도체 관련 책을 섭렵했다. 이때부터 그는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반도체 사업이 자신의 마지막 사업이자 삼성의 대들보가 될 사업이라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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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경기 기흥 반도체 공장을 방문한 이병철 회장(가운데) (출처 :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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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경기 기흥 반도체 공장 전경 (출처 : 삼성전자)

7개월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기획안을 손에 쥐었다. 호암은 기획안 내용 중 반도체 중 메모리 분야는 일본이 미국보다 앞선다는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일본이 하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호암은 메모리 위주로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문제는 메모리반도체에는 D램, S램, 마스크롬, EP롬, EEP 등 종류가 수없이 많다는 것이었다.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심사숙고 끝에 가격경쟁이 치열하고 공급과잉이 예상되더라도 시장규모가 큰 D램 분야에 진출하는 것이 향후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유리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삼성은 1982년 7월, 반도체공장 부지선정 작업에 착수하고 같은 해 10월부터 시장조사와 인재확보에 나섰다. IBM에서 근무한 이임성 박사 등 재미 한국인 과학자들을 차례로 영입해 반도체·컴퓨터 사업팀을 꾸렸다. 이 팀은 시장동향 조사 및 장·단기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수시로 호암에게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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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도쿄선언 이후 귀국해 임원들과 사업계획을 논의하는 이병철 회장 (출처 : 삼성전자)

호암은 1983년 1월 미국에 실리콘밸리에 출장팀을 급파한다. 출장팀은 “향후 5년간 시설투자 4400억 원, 연구개발비 1000억 원을 투입해 첨단기억소자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연간 1억 개 이상 생산할 수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기술개발만 적기에 이루어진다면 그 이익 규모는 천문학적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의견도 새로 덧붙였다. 확신을 얻은 호암은 83년 2월 8일 도쿄 선언을 통해 반도체 사업 진출을 알린다.

이후 시분초를 다투는 숨 가쁜 과정이 이어졌다. 실리콘밸리에 현지법인을 설립해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메모리반도체 연구개발을 진행했고 83년 9월 기흥공장 기공식을 한 지 6개월 내에 공사를 마쳤다. 한편,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일본의 샤프와 정식 기술계약을 체결하고 기초 기술을 배워 64K D램 개발에 나섰다. 개발팀은 마이크론사로부터 받은 64K D램을 부품을 40일 만에 조립공정에 성공, 자신감을 얻어 공정 개발에 착수한다.

1983년 11월 7일, 삼성 개발팀은 마침내 양질의 64K 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였으며 도쿄 선언 이후 9개월 만의 일이었다. 기술 선진국에 비해 10년 이상 뒤쳐졌던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을 4년 정도로 좁히는 성과이기도 했다. 이후 삼성은 승승장구를 거듭하며 세계 1위 반도체 기업으로 우뚝 서는 ‘반도체 신화’를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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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2월 12일 64K D램 개발생산 기념식에서 이병철 회장 (출처 :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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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삼성이 개발에 성공한 64K D램 2013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출처 : 삼성전자)